고구려 광개통대왕비 원문 해설
고구려 광개통대왕비 원문 해설
1. 제1면의 전체 구성
광개토대왕비는 네 면에 글을 새긴 거대한 사면비입니다. 414년 장수왕 3년에 건립되었고, 높이는 약 6.39m입니다.
제1면의 내용은 크게 다음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① 시조 추모왕의 출생
→ ② 북부여에서 남하·홀본 건국
→ ③ 추모왕의 승천과 왕위 계승
→ ④ 광개토대왕의 즉위
→ ⑤ 광개토대왕의 통치와 죽음
→ ⑥ 장례와 능비 건립
→ ⑦ 정복활동 기록의 시작
2. 첫머리 — 추모왕의 탄생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뜻은,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처음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는데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天帝之子 — 천제의 아들
입니다.
고구려 왕실은 자신의 시조를 단순한 인간 왕이 아니라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천손(天孫)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알에서 태어난 추모왕
이어 비문은 추모왕의 신성한 탄생을 기록합니다.
핵심은 추모왕이 알을 깨고 태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의 주몽 건국설화와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비문의 첫 부분은
천제(天帝)
↓
하백의 딸
↓
추모왕(鄒牟王)
이라는 신성한 혈통 구조를 보여줍니다.
4. 북부여에서 남하하다
성장한 추모왕은 북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다가 엄리대수(奄利大水)라는 큰 강에 도착합니다.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자 추모왕은 자신의 신분을 선언합니다.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즉,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왕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비문은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전설이라기보다 하늘과 물의 신이 추모왕의 건국을 돕는다는 왕권신화로 볼 수 있습니다.
5. 홀본에 고구려를 세우다
강을 건넌 추모왕은 비류곡의 홀본(忽本)에 이릅니다.
비문은 이곳에서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합니다.
즉,
북부여
↓
남하
↓
엄리대수 도하
↓
비류곡
↓
홀본(忽本)
↓
고구려 건국
이라는 건국 과정입니다.
홀본은 일반적으로 고구려 초기 도읍지인 졸본(卒本)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6. 추모왕의 승천
광개토대왕비는 추모왕의 죽음을 매우 특별하게 표현합니다.
추모왕이 세상의 왕위에 머무는 것을 즐기지 않자 황룡(黃龍)이 내려와 왕을 맞이했고, 왕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삼국사기』는 동명성왕의 죽음을 비교적 일반적인 왕의 죽음으로 기록하지만, 광개토왕비에는 추모왕의 승천(昇天) 전승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내려온 왕 → 나라를 세움 → 다시 하늘로 올라감
이라는 완결된 천손신화의 구조입니다.
7. 왕통의 계승
추모왕은 왕위를 세자 유류왕(儒留王)에게 물려줍니다.
이어
大朱留王紹承基業
즉,
“대주류왕이 왕업의 기틀을 이어받았다.”
고 기록합니다.
계보를 간단히 하면
추모왕(鄒牟王)
↓
유류왕(儒留王)
↓
대주류왕(大朱留王)
↓
역대 왕
↓
광개토대왕
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류왕은 『삼국사기』의 유리명왕, 대주류왕은 대무신왕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8. 17세손 광개토대왕
비문은 왕통이 이어져 광개토대왕에 도달했음을 강조합니다.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즉,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추모왕에서 광개토대왕으로 왕통을 직접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건국신화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은 천제의 아들인 추모왕의 정통 후계자다.”
라는 정치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9. 18세에 즉위하고 ‘영락’을 사용하다
이어 비문은 광개토대왕의 즉위를 기록합니다.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二九, 즉 2×9 = 18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 왕권의 독자적인 천하관과도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10. 광개토대왕의 통치
비문은 광개토대왕을 매우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합니다.
왕의 은택과 무위가 널리 미쳤으며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고 오곡이 풍성했다고 찬양합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통치를
밖으로는 武威 — 강력한 군사력
안으로는 國富民殷 — 부국과 백성의 번영
이라는 두 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1. 광개토대왕의 죽음과 장례
비문은 광개토대왕이 3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갑인년인 414년 9월 29일 산릉으로 옮겨 장사지냈다고 전합니다. 능비 자체도 장수왕 3년인 414년에 세워진 것으로 정리됩니다.
다만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의 사망을 413년 10월로 기록하여 비문과 연대 표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출판 원고에서는 별도의 주석으로 밝혀두는 것이 좋습니다.
12. 비석을 세운 목적
광개토대왕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입니다.
비문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새겨 후세에 보이기 위해 비를 세웠음을 밝힙니다.
따라서 제1면 앞부분만 보아도 이 비석은
추모왕 건국신화
+
왕통의 정통성
+
광개토대왕의 왕권과 치적
+
광개토대왕의 공훈을 후세에 전승
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 제1면을 이해하는 핵심
제1면의 사상적 구조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天帝 — 하늘
↓
天帝之子 추모왕
↓
북부여 출생
↓
엄리대수 도하
↓
홀본에서 고구려 건국
↓
유류왕
↓
대주류왕
↓
역대 고구려 왕
↓
17세손 광개토대왕
↓
18세 즉위·永樂 연호
↓
강력한 무위와 국가 번영
↓
39세 승하
↓
414년 장례·능비 건립
결국 제1면의 핵심 주제는 ‘광개토대왕의 정통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제에서 시작된 신성한 왕통이 추모왕을 거쳐 광개토대왕에게 이어졌다는 것을 먼저 선언한 다음, 그 뒤에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을 기록하는 구조입니다. 비문 도입부의 판독과 해석은 오늘날에도 일부 글자에서 연구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마멸·결손자는 특정 판독을 무리하게 확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광개토대왕비 제1면은 천제의 아들 추모왕의 탄생과 고구려 건국, 왕통의 계승을 광개토대왕에게 연결하여 왕실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밝히고, 광개토대왕의 치적과 비 건립의 의미를 후세에 천명한 비문의 서문이자 역사 선언문이다.」
광개토대왕비 제1면 원문·음독·해설
제1행 — 추모왕의 신성한 탄생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命駕
음독
유석 시조 추모왕지 창기야, 출자 북부여, 천제지자, 모 하백여랑, 부란강세, 생이유성…… 명가.
직역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처음 세우셨다.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자질이 있었다. …… 수레를 명하였다.”
해설
첫 문장부터 고구려 왕실의 기원을 天帝之子, 즉 ‘천제의 아들’로 선언합니다. 부계는 하늘, 모계는 물의 신인 하백으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추모왕의 왕권은 인간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천상적·신성한 혈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고구려 왕실의 자기인식을 보여줍니다.
▨ 부분은 마멸·판독 곤란 부분이므로 출판본에서도 임의로 보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1면 판독문은 DB에 11행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제2행 — 엄리대수에 이르다
원문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
음독
순행남하, 노유 부여 엄리대수. 왕임진언왈, 아시황천지자, 모하백여랑, 추모왕. 위아연가부귀. 응성즉위……
직역
“왕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였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이어주고 거북을 떠오르게 하라.’ 그러자 그 말에 응하여 곧……”
해설
추모왕이 강을 건너기 전에 다시 자신의 신분을
我是皇天之子
“나는 황천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하 이야기가 아니라 천손인 추모왕에게 자연세계까지 복종한다는 건국신화적 표현입니다.
제3행 — 강을 건너 홀본에 도읍하다
원문
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𦊆履
음독
연가부귀, 연후조도. 어비류곡 홀본서, 성산상이건도언. 불락세위, 천견황룡래하영왕. 왕어홀본동강……
직역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떠올랐다. 그런 뒤 건너갔다. 비류곡 홀본 서쪽의 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 왕은 세상의 왕위에 머무는 것을 즐기지 않았는데, 하늘이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해설
이 행에는 두 가지 핵심 내용이 있습니다.
① 홀본(忽本)에서의 건국
추모왕이 비류곡의 홀본에 도읍을 정합니다. 홀본은 『삼국사기』의 졸본(卒本)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② 황룡의 등장
추모왕의 생애가 끝나는 과정에서도 하늘이 직접 황룡(黃龍)을 내려 보냅니다.
즉 추모왕은 하늘에서 비롯되어 지상에 나라를 세운 뒤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제4행 — 추모왕의 승천과 왕통 계승
원문
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 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음독
용수승천. 고명세자 유류왕 이도흥치. 대주류왕 소승기업. 답지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직역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 세자 유류왕에게 유명을 내려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고, 대주류왕이 왕업의 기틀을 이어받았다. 이어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해설
제1면에서 가장 중요한 왕통 선언입니다.
추모왕(鄒牟王)
↓
유류왕(儒留王)
↓
대주류왕(大朱留王)
↓
역대 왕
↓
17세손 광개토대왕
으로 연결합니다.
유류왕은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유리명왕, 대주류왕은 대무신왕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왕권을 천제의 아들 추모왕으로부터 이어진 정통 왕권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제5행 — 광개토대왕 즉위와 태평성대
원문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恩澤洽亐皇天 威武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
음독
이구등조, 호위영락태왕. 은택흡우황천, 위무진피사해. 소제…… 서녕기업. 국부민은, 오곡풍숙. 호천불……
직역
“열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은택은 황천에까지 미치고 위엄과 무력은 사해에 떨쳤다. ……을 소탕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였으며,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였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었다. 그러나 하늘이……”
해설
二九는 일반적으로 2×9=18세로 해석합니다.
특히 永樂(영락)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또 광개토왕의 업적을 단순한 정복전쟁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 威武振被四海
“무위가 사해에 떨쳤다.”
안으로 — 國富民殷 五穀豊熟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번성하며 오곡이 풍성하였다.”
즉 정복군주이면서 동시에 백성을 안정시킨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합니다.
제6행 — 광개토대왕의 죽음과 능비 건립
원문
弔 卅有九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음독
조, 삽유구 안가 기국. 이갑인년 구월 이십구일 을유, 천취산릉. 어시입비, 명기훈적, 이시후세언. 기사왈……
직역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서른아홉에 왕께서 승하하여 나라를 떠났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일에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이에 비를 세워 공훈과 업적을 새겨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해설
광개토대왕비의 건립 목적을 직접 밝히는 핵심 구절입니다.
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
“비를 세워 공훈과 업적을 새겨 후세에 보인다.”
따라서 앞의 제1~6행은 사실상 광개토대왕비 전체의 서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DB의 개관은 이 비를 장수왕 3년인 414년의 것으로 제시하며, 높이 약 6.39m의 예서 비문으로 설명합니다.
제7행 — 395년 패려 정벌 시작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山 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
음독
영락오년 세재을미, 왕이 패려……인, 궁솔왕토. 과부산……산, 지염수상, 파기삼부락 육칠백영, 우마군……
직역
“영락 5년 을미년(395), 왕은 패려가 ……하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 등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세 부락 600~700영을 격파하고 소와 말……”
해설
여기서부터 비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제1~6행 = 건국·왕통·왕의 생애
제7행 이후 = 광개토대왕의 정복기사
가 됩니다.
패려(稗麗)는 일반적으로 거란계 세력으로 이해하며, 염수(鹽水)는 시라무렌강 등 여러 비정설이 있습니다.
따라서 출판본 지도에는 반드시 ‘추정’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8행 — 패려 정벌과 귀환
원문
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候城 力城 北豊 五備海 遊觀土境 田獵而還 百殘新羅舊是屬民
음독
양불가칭수. 어시선가, 인과양평도, 동래후성·역성·북풍·오비해, 유관토경, 전렵이환. 백잔신라 구시속민……
직역
“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수레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오면서 후성·역성·북풍·오비해를 거쳐 영토와 경계를 둘러보고 사냥한 뒤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해설
패려 정벌 후 광개토왕이 양평도(襄平道) 등을 거쳐 귀환합니다.
특히
遊觀土境
‘영토와 경계를 돌아보았다’
는 표현은 고구려가 주변 공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행 끝에서 갑자기 百殘·新羅가 등장하면서 남방관계 기사로 넘어갑니다.
百殘(백잔)은 고구려 측에서 백제를 낮추어 표현한 명칭입니다.
제9행 — 신묘년 기사와 백제 정벌의 시작
원문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東▨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討伐殘國 軍▨▨
음독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 래도해 파백잔 동▨신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군 토벌잔국……
직역·해설
이 부분은 바로 유명한 신묘년조(辛卯年條)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마멸된 글자와 문장구조 때문에 광개토대왕비 전체에서 가장 논쟁이 큰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의 주어·목적어·문장 연결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해석이 크게 달라집니다.
따라서 출판자료에서는 특정 해석을 본문에 단정적으로 넣기보다,
「신묘년조 — 판독 및 해석에 여러 학설이 있음」
이라고 표시하고 별도의 주석에서 다루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DB 역시 여러 판독 연구를 교감하여 제시하며, 관련 연구가 지속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행 후반의 六年丙申부터는 비교적 분명하게 영락 6년(396) 광개토대왕의 백제 친정으로 이어집니다.
제10행 — 백제 여러 성을 공격하다
원문
因攻取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弖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
음독
인공취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직역
“이어 공격하여 영팔성·구모로성·각모로성·간저리성……각미성·모로성·미사성……아단성·고리성…… 등을 빼앗았다.”
해설
396년 백제 정벌에서 점령한 성들의 이름이 열거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성의 현대 위치를 무리하게 확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 성의 비정에는 학설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제11행 — 백제 정벌 성곽 목록의 계속
원문
利城 雜珍城 奧利城 句牟城 古須耶羅城 莫▨▨▨▨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農賣城 豆奴城 沸▨▨
음독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막▨▨▨▨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비▨▨……
직역
“……리성·잡진성·오리성·구모성·고수야라성……성이야라성·전성·어리성·농매성·두노성·비…… 등을 공격하였다.”
해설
제11행은 문장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1면 제11행의 백제 성곽 목록 → 제2면 제1행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제2면에서도 여러 성의 이름이 계속되고, 결국 백제 왕성을 압박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내용으로 발전합니다. 실제 교감판독문도 제1면 11행 직후 제2면 1행을 연속된 성곽 목록으로 제시합니다.
제1면 전체 구조를 다시 보면
| 행 | 주요 내용 | 역사적 의미 |
|---|---|---|
| 1행 | 추모왕 탄생 | 天帝之子·천손의식 |
| 2행 | 엄리대수 도하 | 신성한 건국설화 |
| 3행 | 홀본 건국 | 고구려 건국 |
| 4행 | 승천·왕위 계승 | 왕통의 정통성 |
| 5행 | 광개토왕 즉위 | 18세 즉위·영락 연호 |
| 6행 | 승하·비 건립 | 공훈을 후세에 전승 |
| 7행 | 395 패려 정벌 | 서북방 원정 |
| 8행 | 패려 정벌 귀환 | 영역 인식·남방기사 전환 |
| 9행 | 신묘년조·396 백제 정벌 | 최대 논쟁 부분 |
| 10행 | 백제 성곽 공격 | 남진 확대 |
| 11행 | 성곽 목록 계속 | 제2면으로 연결 |
출판 원고에서 특히 주의할 5가지
첫째, ▨는 억지로 복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판독 불능 또는 이견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사료정보입니다.
둘째, 國𦊆上의 특수자는 일반적인 연구·번역에서는 흔히 國岡上(국강상)으로 표기하지만, 원석의 자형과 교감판독문을 구분하여 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제1면 9행 신묘년조는 별도 주석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문 전체에서 가장 정치적·역사학적으로 논쟁이 큰 부분 중 하나입니다. 실제 한국고대사료DB 참고문헌에도 신묘년조 판독·해석에 관한 다수의 연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넷째, 百殘은 비문에 실제 사용된 고구려 측의 백제 지칭이므로, 번역에서는 처음에 “백잔(百殘, 비문에서 백제를 낮추어 부른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이후 ‘백제’로 옮기는 방법이 좋습니다.
다섯째, 행 구분과 문장 구분은 서로 다릅니다. 비석의 제1행·제2행은 물리적인 세로 행이고, 한 문장은 다음 행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출판본에서는 「원석 행 구분」과 「현대적 문장부호」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1면의 핵심 해석
제1면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읽으면,
천제 → 추모왕 → 고구려 건국 → 유류왕·대주류왕 → 17세손 광개토대왕 → 영락 연호와 태평성대 → 왕의 죽음과 능비 건립 → 패려 정벌 → 백제 정벌
이라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제1면은 단순한 왕의 전쟁 기록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롯된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이 광개토대왕에게 계승되었고, 그 정통한 왕이 사방을 정벌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고구려 자체의 역사관을 집약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출판본의 원문 기준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가 장수왕 3년(414), 높이 6.39m, 예서의 광개토왕릉비로 소개하고 있으며, 현재 교감판독문은 이정빈이 여러 기존 판독안을 대조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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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제2면 원문·음독·해설
광개토대왕비 제2면 10행을 실제 행 순서대로 정리하겠습니다. 제2면은 제1면에서 시작된 396년 백제 정벌의 결말 → 398년 숙신 방면 경략 → 399년 신라의 구원 요청 → 400년 고구려군 5만의 신라 구원과 왜군 격퇴로 이어집니다.
광개토대왕비 제2면 — 전체 구성
| 행 | 주요 내용 |
|---|---|
| 1~3행 | 396년 백제 정벌·성곽 목록·아리수 도하 |
| 4~5행 | 백제왕 항복·58성 700촌 확보 |
| 6행 | 398년 숙신 방면 경략·399년 백제의 맹약 위반 |
| 7행 | 신라의 구원 요청 |
| 8행 | 400년 보병·기병 5만 파견 |
| 9~10행 | 왜군 추격·임나가라 방면 진격 |
국사편찬위원회 판독문에서 제2면은 정확히 10행으로 구성됩니다.
제1행 — 백제 성곽 공격의 계속
원문
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亐婁城蘇灰
음독
리성·미추성·야리성·태산한성·소가성·돈발성·▨▨성·▨루매성·산나성·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
직역
“……리성·미추성·야리성·태산한성·소가성·돈발성……루매성·산나성·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성 등을 취하였다.”
해설
제2면 제1행은 독립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제1면 제10~11행에서 시작된 396년 백제 정벌의 성곽 목록이 그대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제1면과 제2면은 물리적인 비석의 면은 달라도 문장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성들의 현재 위치는 여러 비정설이 있으므로 출판자료에서는 현대 지명을 확정적으로 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2행 — 백제 여러 성의 계속된 함락
원문
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味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
음독
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성·미성……리성·취추성·▨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
직역
“……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성·미성……리성·취추성……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성……”
해설
계속해서 백제의 성곽들이 열거됩니다.
이 성곽 목록은 뒤의 “58성 700촌”이라는 정벌 결과와 연결됩니다.
다만 비문에서 열거되는 성의 수와 ‘58성’의 관계, 각 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 사이에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따라서 비문에 적힌 명칭 자체를 우선 제시하는 방식이 출판자료로 가장 안전합니다.
제3행 —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백제 왕성을 압박하다
원문
城▨▨城儒▨盧城仇天城▨▨▨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刾迫城▨▨
음독
성·▨▨성·유▨로성·구천성·▨▨▨성……기국성. 잔불복의 감출백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직역
“……여러 성과 그 국성을 공격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므로 왕의 위엄이 크게 떨쳐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압박하였다.”
해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지명이 등장합니다.
渡阿利水 — 아리수를 건너다
아리수는 일반적으로 한강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백제 여러 성을 공략한 뒤 한강을 건너 백제 왕성을 직접 압박하는 단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殘은 百殘, 즉 비문에서 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표현입니다.
제4행 — 백제왕이 항복하다
원문
侵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
음독
침혈……편위성, 이잔주곤핍, 헌……남녀생구일천인 세포천필, 궤왕자서, 종금이후 영위노객. 태왕은사선……
직역
“성을 포위하니 백잔의 왕이 곤궁하고 핍박을 받아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쳤다. 왕 앞에 꿇어앉아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이전의……”
해설
396년 백제 정벌의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백제왕은 당시 아신왕(阿莘王)입니다.
비문은 백제왕이
남녀 1,000명
+ 세포(細布) 1,000필
을 바쳤다고 기록합니다.
특히
從今以後 永爲奴客
“지금부터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
라는 표현은 고구려 측의 우월한 국제질서 인식을 강하게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다만 이것을 현대적 의미의 ‘노예’로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고구려에 복속·신종한다는 정치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제5행 — 58성·700촌을 얻다
원문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
음독
미지건, 녹기후순지성. 어시득 오십팔성 촌칠백, 장잔주제 병대신십인, 선사환도. 팔년무술 교견편사 관……
직역
“이전에 잘못한 허물은 용서하고 이후 순종할 성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58성과 700촌을 얻고, 백잔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영락 8년 무술년에 별군을 보내……”
해설
396년 백제 정벌의 최종 결과입니다.
五十八城 村七百
58성·700촌
이라는 숫자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고구려로 귀환했습니다.
따라서 396년 정벌은
백제 여러 성 공격 → 아리수 도하 → 왕성 압박 → 아신왕 항복 → 58성·700촌 확보
라는 구조입니다.
제6행 — 398년 숙신 경략과 399년 백제의 맹약 위반
원문
肅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음독
숙신토곡, 인편초득 막▨라성·가태라곡, 남녀삼백여인. 자차이래 조공논사. 구년기해, 백잔위서 여왜화……
직역
“숙신의 지역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 기회에 막…라성과 가태라곡을 취하고 남녀 300여 명을 얻었다. 이때부터 조공하며 일을 논하게 되었다. 영락 9년 기해년(399),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해설
제6행에는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락 8년(398)
→ 숙신(肅愼) 방면 경략
→ 성·곡을 확보하고 남녀 300여 명을 얻음
→ 이후 조공
그리고 곧바로
영락 9년(399)
→ 백제가 이전의 맹약을 위반
→ 왜와 관계를 맺음
으로 넘어갑니다.
숙신의 정확한 활동지역과 해당 성·곡의 위치에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제7행 —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다
원문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稱其忠誠
음독
통.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태왕은자, 칭기충성……
직역
“왕이 평양으로 순행하였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그 나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노객인 신라는 왕께 귀의하여 명을 청합니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고……”
해설
399년 신라 구원 요청을 기록한 핵심 부분입니다.
신라는 왜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합니다.
비문은 신라를 奴客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 역시 실제 노예라는 뜻이라기보다 고구려 중심의 정치적 상하관계를 표현한 비문의 서술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이때 평양을 순행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제8행 — 400년, 보병·기병 5만을 신라에 보내다
원문
特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음독
특견사환 고이▨계.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 왜적퇴.
직역
“특별히 사신을 돌려보내 계책을 알려주었다. 영락 10년 경자년(400),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군이 가득했는데,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물러났다.”
해설
광개토대왕비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기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라는 목적이 비문에 명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한 ‘남방 정벌’보다는 신라 구원을 위한 대규모 군사 파견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제9행 — 왜군을 임나가라까지 추격
원문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新羅城▨城倭▨▨潰城▨
음독
……배급추지 임나가라 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수병……신라성……성 왜……궤성……
직역
마멸된 부분이 많아 전체 문장을 확정적으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비교적 분명한 부분은,
“급히 뒤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였다……”
정도입니다.
해설
고구려군은 신라에서 왜군을 몰아낸 뒤 임나가라(任那加羅) 방면까지 추격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任那加羅, 從拔城, 安羅人戍兵의 정확한 해석과 당시 가야 여러 세력과의 관계에는 학설이 많습니다.
따라서 출판본에서는 “임나가라=일본의 식민통치기관”과 같은 식의 단정적 해석을 피하고, 비문의 원문과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병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10행 — 심하게 훼손된 부분
원문
□□□□□□□□□□□□□□□□▨▨盡拒▨▨安羅人戍兵滿▨▨▨▨其▨▨▨▨▨▨▨言
음독
……진거……안라인수병만……기……언.
직역
이 행은 결손과 마멸이 매우 심하여 전체적인 문장 복원이 어렵습니다.
해설
제10행은 제9행의 신라·가야지역 전투기사가 이어지는 부분이지만 상당수 글자가 소실되었습니다.
따라서 출판자료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읽히지 않는 글자는 읽히지 않는 상태로 남겨둔다.”
즉 ▨, □를 임의의 글자로 채워 넣어 하나의 완성된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교감판독문도 □와 ▨ 등을 사용해 원석 상태와 학자들의 판독 차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교감판독문은 다케다 유키오의 판독을 기초로 여러 연구자의 판독안을 대조한 것입니다.
제2면의 역사 흐름
제2면 전체를 연결하면 매우 명확합니다.
396년 백제 정벌
↓
백제 여러 성 함락
↓
아리수(한강) 도하
↓
백제 왕성 포위
↓
아신왕 항복
↓
58성·700촌 확보
↓
398년 숙신 방면 경략
↓
399년 백제의 맹약 위반·왜와 화통
↓
신라의 구원 요청
↓
400년 고구려 보병·기병 5만 파견
↓
왜군 격퇴
↓
임나가라 방면까지 추격
↓
제3면으로 계속
따라서 제1면이 “고구려 건국과 왕통 → 광개토대왕 → 초기 정복활동”을 보여준다면, 제2면은 광개토대왕의 남방정책과 한반도 남부 국제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면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출판용으로 특히 주의할 부분은 제9~10행입니다. 마멸이 심하고 任那加羅·安羅人戍兵 등의 해석에 학설 차이가 크므로, 여기서는 원문 판독과 역사적 해석을 명확히 구분해서 편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광개토대왕비 제3면 원문·음독·해설
광개토대왕비 제3면 전문 14행을 실제 행 순서대로 정리하겠습니다. 제3면은 앞부분의 마멸이 특히 심하지만, 내용상 매우 중요합니다. 400년 신라 구원전의 결말 → 404년 왜군의 대방 침입과 격퇴 → 407년 대규모 전투 → 410년 동부여 정벌 → 수묘인 연호(烟戶) 기록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광개토대왕비 제3면 원문과 해설
제3면은 모두 14행입니다. 특히 제1~3행은 훼손이 심하므로, 읽히지 않는 글자를 억지로 복원하지 않고 ▨ 그대로 두는 것이 출판자료로는 가장 안전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교감판독문 역시 여러 기존 판독을 대조하고 판독 불능자를 구분하여 표시합니다.
제1행 — 400년 신라 구원전 기록의 계속
원문
▨▨▨▨▨▨▨▨▨▨▨▨▨▨▨興▨▨▨▨▨▨▨▨▨▨辭▨▨▨▨▨▨▨▨▨▨▨▨▨潰
음독
대부분 판독 불능.
직역·해설
제2면 마지막의 400년 신라 구원·왜군 추격 기사가 계속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3면 제1행은 거의 전부 마멸되어 있어 완전한 문장으로 복원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행은 “400년 신라 구원전의 후속 기사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판독 곤란”이라고 처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제2행 — 신라왕과 고구려의 관계
원문
▨▨▨▨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句
음독
……안라인수병. 석 신라매금 미유신래논사……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매금…… 복구……
직역
“……안라인 수병…… 예전에 신라 매금은 몸소 와서 일을 논한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매금……”
해설
여기서 중요한 말은 寐錦(매금)입니다.
이는 신라왕을 가리키는 칭호로 이해됩니다.
특히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예전에 신라 매금이 몸소 와서 일을 논한 적이 없었다.”
라는 부분은 신라와 고구려의 정치적 관계를 살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다만 뒤쪽이 크게 훼손되어 있으므로 신라왕이 실제로 광개토대왕에게 직접 조현했다고 단정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3행 — 404년 왜의 대방지역 침입
원문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率▨▨從平穰
음독
……조공. 십사년 갑진, 이왜불궤 침입대방계…… 석성…… 연선…… 솔…… 종평양……
직역
“……조공하였다. 영락 14년 갑진년(404), 왜가 법도를 따르지 않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석성…… 배를 잇고…… 평양으로부터……”
해설
여기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됩니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즉,
“영락 14년(404), 왜가 불궤하여 대방의 경계로 침입하였다.”
입니다.
이는 400년 신라 구원전과 달리 왜군이 고구려의 대방 방면까지 북상하여 침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제4행 — 왜군을 크게 격파하다
원문
▨▨▨鋒相遇王幢要截盪刾倭寇潰敗斬殺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음독
……봉상우. 왕당요절 탕자왜구, 궤패 참살무수. 십칠년 정미, 교견보기오만……사.
직역
“……선봉이 서로 마주쳤다. 왕의 군대가 요격하여 왜구를 쳐부수니 무너져 패하였고, 참살한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영락 17년 정미년(407),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해설
404년 전투의 결과가 명확하게 기록됩니다.
倭寇潰敗 斬殺無數
“왜구가 무너져 패하고 참살된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즉 대방지역까지 침입한 왜군을 고구려가 크게 격파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행 후반에서 바로 407년 전쟁기사가 시작됩니다.
제5행 — 407년 전쟁과 갑옷 1만여 벌 노획
원문
▨▨合戰斬殺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那
음독
……합전, 참살탕진. 소획 개갑일만여령, 군자기계 불가칭수. 환파 사구성·루성·▨주성……
직역
“……교전하여 참살하고 모두 소탕하였다.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었으며 군수물자와 병기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루성·……주성…… 등을 격파하였다.”
해설
407년 전투의 규모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所穫鎧鉀 一萬餘領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또 군수물자와 병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노획했다고 합니다.
다만 407년에 고구려가 누구와 싸웠는지는 앞부분의 결손 때문에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백제전으로 보는 견해 등 여러 해석이 있으므로, 출판자료에서는 단순히 “407년 전쟁”이라고 표시하고 상대를 단정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6행 — 410년 동부여 정벌
원문
▨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城國駭▨▨▨▨▨▨▨
음독
……성. 이십년 경술, 동부여 구시 추모왕속민, 중반불공. 왕궁솔왕토. 군도여성, 이여성국해……
직역
“……성. 영락 20년 경술년(410), 동부여는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에 이르자 동부여가 크게 놀라……”
해설
광개토대왕의 대표적인 친정(親征) 기록입니다.
특히 비문은 동부여를
舊是鄒牟王屬民
“본래 추모왕의 속민”
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정벌을 새로운 영토 침략이라기보다 시조 추모왕 시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행위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제7행 — 동부여 유력자들의 귀부
원문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음독
……왕은보복. 어시선환. 우기모화 수관래자, 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추사루압로·숙사사압로……
직역
“……왕의 은혜가 널리 덮였다. 이에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또 왕의 교화를 흠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로는 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추사루압로·숙사사압로…… 등이 있었다.”
해설
정벌 뒤 동부여의 유력자들이 고구려에 귀부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鴨盧(압로)의 정확한 성격에는 논의가 있지만, 일정한 직위·칭호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동부여 정벌이 단순한 군사적 승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지 지배층의 귀부를 통한 정치적 복속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제8행 — 광개토대왕 정복활동의 총결산과 수묘인 기록 시작
원문
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
음독
압로. 범소공파성 육십사, 촌 일천사백. 수묘인연호. 매구여민 국연이 간연삼, 동해가 국연삼 간연오, 돈성……
직역
“……압로. 무릇 공격하여 격파한 성이 64성, 촌이 1,400촌이었다. 수묘인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매구여민은 국연 2, 간연 3, 동해가는 국연 3, 간연 5……”
해설
이 행은 광개토대왕비 전체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부분까지가 정복기사라면,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무릇 공격하여 격파한 성은 64성, 촌은 1,400촌이었다.”
라고 동부여 정벌의 성과를 정리한 뒤,
守墓人烟戶
즉 수묘인 연호(烟戶) 기록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부터 광개토대왕비는 군사사가 아니라 왕릉 관리제도와 수묘호 편성을 보여주는 사회사 자료로 성격이 바뀝니다.
제9행 — 구민 수묘호의 열거
원문
民四家盡爲看烟亐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
음독
민사가 진위간연. 우성 일가위간연. 비리성 이가위국연. 평양성민 국연일 간연십. 자련 이가위간연. 패루……
직역
“……백성 4가는 모두 간연으로 삼았다. 우성 1가는 간연, 비리성 2가는 국연, 평양성민은 국연 1·간연 10, 자련 2가는 간연……”
해설
여기서부터 지역별로 수묘역을 부담하는 민호의 숫자가 구체적으로 열거됩니다.
핵심 용어는 두 가지입니다.
國烟(국연)
看烟(간연)
입니다.
두 집단의 정확한 사회적 성격과 부담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상급·하급 수묘인’처럼 확정해서 번역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10행 — 수묘호 명단의 계속
원문
人國烟一看烟卌三▼谷二家爲看烟▼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谷三家爲看烟新城三
음독
인 국연일 간연사십삼……곡 이가위간연……성 이가위간연, 안부련 이십이가위간연……곡 삼가위간연, 신성 삼……
직역
“……인은 국연 1·간연 43, …곡 2가는 간연, …성 2가는 간연, 안부련 22가는 간연, …곡 3가는 간연, 신성 3……”
해설
제9행에 이어 구민 수묘호의 지역별 편성을 기록합니다.
卌은 40을 뜻하는 고대 숫자 표기입니다.
제11행 — 신래한예(新來韓穢)의 등장
원문
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
음독
가위간연. 남소성 일가위국연. 신래한예, 사수성 국연일 간연일, 모루성 이가위간연, 두비압잠한 오가위……
직역
“……가는 간연으로 삼았다. 남소성 1가는 국연으로 삼았다. 새로 들어온 한·예(新來韓穢) 가운데 사수성은 국연 1·간연 1, 모루성 2가는 간연, 두비압잠의 한인 5가는……”
해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용어가 등장합니다.
新來韓穢
“새로 들어온 한·예”
입니다.
이는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과정에서 새롭게 고구려 지배 아래 편입된 한(韓)·예(穢)계 주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뒤의 제4면에서 이들을 광개토대왕릉의 수묘인으로 삼은 이유가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제12행 — 신래한예 수묘호의 계속
원문
看烟句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須耶羅城一家爲看烟
음독
간연. 구모객두 이가위간연, 구저한 일가위간연, 사조성 한예 국연삼 간연이십일, 고수야라성 일가위간연.
직역
“……간연으로 삼았다. 구모객두 2가는 간연, 구저의 한인 1가는 간연, 사조성 한예는 국연 3·간연 21, 고수야라성 1가는 간연으로 삼았다.”
해설
신래한예의 출신지역과 수묘호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이 기록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지역 주민들이 왕릉 관리체계에 어떻게 편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제13행 — 아단성·잡진성 등 수묘호
원문
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
음독
경고성 국연일 간연삼, 객현한 일가위간연, 아단성·잡진성 합십가위간연, 파노성한 구가위간연, 구모로……
직역
“경고성은 국연 1·간연 3, 객현의 한인 1가는 간연, 아단성과 잡진성은 합하여 10가를 간연, 파노성의 한인 9가는 간연, 구모로……”
해설
앞서 396년 백제 정벌 기사에 등장했던 일부 성 이름이 수묘호 명단에서 다시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정복된 지역의 일부 주민이 이후 고구려 왕릉의 수묘역 체계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활용됩니다.
제14행 — 수묘호 명단이 제4면으로 이어짐
원문
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음독
성 사가위간연, 각모로성 이가위간연, 모수성 삼가위간연, 간▨리성 국연일 간연삼, 미추성 국연일 간연……
직역
“……성 4가는 간연, 각모로성 2가는 간연, 모수성 3가는 간연, 간…리성은 국연 1·간연 3, 미추성은 국연 1·간연……”
해설
문장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3면 제14행 → 제4면 제1행
으로 수묘인 명단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실제 교감판독문에서도 제4면 제1행은 이 명단의 연속으로 시작합니다.
제3면 전체 흐름
제3면을 한눈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2행
400년 신라 구원전의 후속 기록
↓
제3~4행
404년 왜군의 대방 침입 → 고구려군 격퇴
↓
제4~5행
407년 보병·기병 5만 파견 → 대규모 승리 → 갑옷 1만여 벌 노획
↓
제6~7행
410년 동부여 정벌 → 동부여 유력자 귀부
↓
제8행
64성·1,400촌 정복 기록
↓
정복기사 종료
↓
守墓人烟戶
↓
제8~14행
구민·신래한예의 수묘호 명단
↓
제4면으로 계속
여기서 한 가지는 앞서 정리한 내용에서 정정해서 기억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제3면 제8행의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즉 64성·1,400촌은 문맥상 바로 앞의 410년 동부여 정벌 성과를 결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 표점문의 구조입니다. 이를 광개토대왕 재위 전체의 모든 정복지를 합산한 숫자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제3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문의 성격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제1면부터 이어진 광개토대왕의 정복기사는 제3면 중간에서 마무리되고, 이후에는 왕릉을 관리한 수묘인(守墓人)의 출신지역과 국연·간연의 숫자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제4면에서는 그 명단을 마무리한 뒤 광개토대왕이 수묘제를 개편한 이유와 총 330가의 편성, 수묘인 매매금지 규정까지 설명합니다.
출판용 핵심 문장으로 정리하면,
“광개토대왕비 제3면은 400년 신라 구원전의 후속 기사에서 시작하여 404년 왜군 격퇴, 407년 대규모 군사작전, 410년 동부여 정벌을 기록한 뒤, 정복기사에서 수묘인 연호 기록으로 전환한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대외 팽창과 정복지 주민의 왕릉 관리체계 편입을 하나의 면에서 함께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원문 판독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교감판독문을 기준으로 했으며, 이 판독문은 다케다 유키오의 판독을 바탕으로 여러 연구자의 이견을 함께 대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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