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뿌리를 찾아서

  

    조선왕실의 뿌리를 찾아서

 양녕대군18대 이병녕(李 昺 寧) : 편저



1. 전주이씨 득성의 유래

ㅡ 복희씨(伏羲氏) — 중국 고대 문명의 시조 전승

2. 조선왕실의 뿌리 조경단

- 조산왕실의 뿌리를 이은 승경원

3.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 목조·익조·도조·환조가 닦은 조선 건국의 기반

4. 조선 왕실의 뿌리를 품은 준경묘와 영경묘

5.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즉위, 그리고 한양 천도

6. 조선 왕실의 조상과 나라의 정통성을 기리는 국가 제례

- 종묘대제, 사직대제, 원단제

7.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온수현 온행

- 신료들 반대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은 온천

8. 조선 왕실의 치유온천, 온양행궁

- 세종대왕의 온행(병을 다스리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다)

9.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숭조돈종(崇祖敦宗)의 의미

 

 

1. 이씨 득성의 유래 — 복희씨에서 李氏까지

 

(1) 복희씨(伏羲氏) — 중국 고대 문명의 시조 전승

복희씨는 중국 고대 전설에서 가장 오래된 성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팔괘를 만들고 백성에게 어로·목축 등을 가르쳤다는 전승이 있으며, 후대에는 신농씨와 함께 중국 고대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만 복희씨를 이씨의 직접적인 혈통상 시조라고 확인할 수 있는 『사기』 등의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출판 원고에서는 「이씨 선계」보다는 「동아시아 고대 시조 전승의 출발」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판정: 전설·신화적 인물

 

(2) 신농씨(神農氏) — 염제(炎帝) 전승

신농씨는 농경과 의약을 백성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고대 성왕입니다.

후대에는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로 불리며 황제와 함께 ‘염황(炎黃)’이라는 중국 고대 문명의 상징적 시조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농씨 → 황제 → 전욱으로 직접 이어지는 부자 계보는 아닙니다.

따라서 이씨 득성 계보에 신농씨를 직접 넣기보다는 고대 문명 계통의 배경 인물로 표시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판정: 전설·신화적 인물

  


(3)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

이씨 득성 전승과 직접 연결되는 계보는 황제부터 비교적 분명하게 문헌에 나타납니다.

『사기』 「오제본기」에는 황제가 서릉씨의 딸 누조(嫘祖)를 정비로 맞아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창의(昌意)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의의 아들이 고양(高陽), 즉 전욱(顓頊)입니다.

따라서 『사기』에 나타나는 관계는

황제 → 창의 → 전욱

입니다.

판정: 고대 전승이지만 『사기』에 계보 기록 존재

 

(4)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

『사기』 「오제본기」에는 전욱에 대하여 황제의 손자이며 창의의 아들이라고 기록합니다.

후대의 이씨 계보에서 특히 중요한 사료가 『신당서(新唐書)』 「종실세계표(宗室世系表)」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씨의 계통을

「李氏,出自嬴姓,帝顓頊高陽氏」

라고 설명하면서 이씨의 먼 계통을 전욱 고양씨에게 연결합니다. 이어지는 계보는

전욱 → 대업(大業) → 여화(女華) → 고요(皋陶)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단순한 현대 족보 이야기가 아니라 『신당서』에 실제로 수록된 당 왕실의 계보 인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5) 고요(皋陶) — ‘理氏’의 기원

여기서부터 이씨 득성 이야기의 핵심이 시작됩니다.

고요는 요·순 시대에 형벌과 사법을 담당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신당서』 「종실세계표」는 고요가 요임금의 대리(大理)가 되었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이 직책을 맡으면서 관직명인 ‘理’를 씨로 삼았다고 설명합니다.

즉, 大理(관직) → 理氏

라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李氏였다는 것이 아니라 理氏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득성설의 핵심입니다.

판정: 『신당서』 등 후대 성씨·왕실 계보 기록


 

(6) 理氏에서 李氏로

후대 성씨 문헌에서는 상나라 말기 고요의 후손 이징(理徵)이 주왕(紂王)에게 직간하다 죽임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그의 부인이 어린 아들 이정(利貞)을 데리고 피신하던 중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다가 오얏나무 열매[李子]를 먹고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기존의 理氏를 李氏로 바꾸었다는 것이 유명한 ‘목자득성(木子得姓)’ 전승입니다.

여기에서 李라는 글자를 보면

木 + 子 = 李가 됩니다.

즉,

木(나무 목) + 子(아들 자) → 李(오얏 리)

라는 설명입니다.

 

이 때문에 이리정(李利貞)을 후대에 이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로 받드는 전승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기』 같은 동시대 사료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후대 성씨 문헌에 나타나는 득성 전승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7) 한눈에 보는 계통

복희씨(伏羲氏)

↓고대 문명의 시조 전승

↓신농씨(神農氏·炎帝)

↓※ 여기까지는 이씨의 직접 계보로 확정할 수 없음

황제(黃帝)

↓창의(昌意)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

↓대업(大業)

↓여화(女華)

↓고요(皋陶)

↓요의 대리(大理)를 맡았다는 전승

↓관직 理 → 理氏

↓후손 이징(理徵)

↓아들 이리정(李利貞)

↓理 → 李로 바꾸었다는 전승

↓李氏 득성

『사기』는 황제 → 창의 → 전욱의 관계를 기록하고, 『신당서』 「종실세계표」는 이씨를 전욱 고양씨의 후예로 설명하면서 전욱 → 대업 → 여화 → 고요라는 계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전주이씨로 넘어갈 때

여기서 한 가지 선을 반드시 그어야 합니다.

이리정 → …… → 전주이씨 시조 이한

이라는 전체 계보가 연속적인 동시대 사료로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조선왕실의 뿌리를 찾아서』**에서는 이렇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복희·신농

고대 문명의 시조 전승

황제 → 창의 → 전욱 → 고요

『사기』·『신당서』 등에 나타나는 고대 계보 및 이씨 선계 전승

고요 → 理氏 → 이리정 → 李氏

후대 성씨 문헌에 전하는 이씨 득성설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

조선 왕실이 공식적으로 추숭한 전주이씨 시조

즉 「복희 → 신농 → 황제 → 전욱 → 고요 → 이리정 → 이한」을 모두 하나의 확정된 혈통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2. 조경단·대한조경단비·승경원

ㅡ 실록과 금석문에 근거한

 

조경단의 조성 경위와 역사적 성격
「대한조경단비」 원문 전문·독음·해설
승경원과 승경묘의 건립 의미

 

머리말

전주는 전주 이씨의 관향이자 조선 왕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았던 상징적인 고장이다. 경기전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라면, 조경묘는 전주 이씨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경단은 이한의 묘가 있다고 전해 온 건지산에 대한제국 고종이 1899년 조성한 제향 공간이다. 그리고 승경원은 조경단과 조경묘에서 빠져 있던 시조 2세부터 17세까지의 선계를 제향하기 위해 2023년에 완성한 현대의 공간이다.

이 글은 세 유적을 하나의 계통으로 설명하되, 문헌으로 확인되는 사실과 후대 전승을 구분한다. 특히 조경단을 ‘확인된 이한의 묘’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영조 때의 조사에서도 묘의 확실한 표지를 찾지 못했고, 1899년 봉심에서도 정확한 봉분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경단은 시조 묘소에 관한 오랜 전승을 바탕으로 국가가 묘역을 정비하고 제단을 설치한 곳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1) 조경단 — 전승의 묘역에서 황실의 제단으로

 


가. 조경단의 이름과 위치

조경단(肇慶壇)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에 있다. ‘조경’의 조(肇)는 ‘비롯하다’, 경(慶)은 ‘경사’를 뜻한다. 따라서 조경단은 ‘왕업의 경사가 비롯된 제단’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이름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이한에서 조선 왕조의 뿌리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현재 국가유산 행정에서는 조경단을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역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사료를 세밀하게 읽으면 ‘묘역’이라는 말은 정확한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이한의 묘가 있다고 전해 온 건지산 일대를 왕실이 성역화한 공간이라는 뜻에 가깝다.

출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조경단」;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영건청의궤』; 국립전주박물관, 이동희, 「조경묘와 조경단」.

 

나. 시조 이한과 기록의 한계

전주 이씨의 계보에서는 이한(李翰)을 시조로 받든다. 전승에 따르면 이한은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 다만 이한의 생몰년과 구체적인 행적은 동시대의 신라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국조선원보략』과 후대의 선원 계보가 시조로 기록한 내용이 중심이므로, 출판 원고에서는 ‘신라 때 사공을 지낸 것으로 전해지는 전주 이씨의 시조’라고 표현하는 것이 안전하다.

태조 이성계와 이한 사이의 세대 수 역시 자료의 계수 방식에 따라 ‘21대조’ 또는 ‘태조가 22세손’이라고 표현된다. 두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조상 쪽에서 세면 21대조이고, 시조를 1세로 하여 후손을 세면 태조는 22세가 된다.

 

다. 건지산 시조묘 전승과 영조 때의 논의

건지산에 왕실 선조의 오래된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는 조선 후기 중앙 정치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1729년 영조가 건지산을 옹주방에 절수하려 하자 전라감사 이광덕이 건지산은 경기전의 주맥으로 보호해 온 곳이라고 반대하였다. 같은 해 윤순도 건지산의 오래된 묘와 보호 문제를 언급하였다.

출전: 『영조실록』 권22, 영조 5년 4월 2일 병자; 『승정원일기』 영조 5년 윤7월 23일 을미.

1765년 학림군 이육은 전주 건지산에 조선 왕실 시조 사공공의 묘가 있다고 하면서 봉축과 숭봉을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묘의 실체를 분명하게 확인하기 어려웠다. 영조 47년인 1771년에는 조경묘를 경기전 북쪽에 세워 이한과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했지만, 건지산 묘역 조성은 확실한 근거를 얻지 못하여 시행하지 못했다.

출전: 『영조실록』 권106, 영조 41년 4월 14일 기미; 『영조실록』 영조 47년 조경묘 창건 관련 기사; 『완산지』 「총묘」.

 

라. 1898~1899년 조경단 조성

조경단 조성은 대한제국 선포 다음 해인 1898년 의정부 찬정 이종건이 건지산 시조묘역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다시 추진되었다. 1899년 고종은 조경단영건청을 설치하고, 궁내부 특진관 이재곤을 봉심재신으로 전주에 보냈다.

이재곤은 왕자봉 아래에서 상묘와 하묘가 있다는 주민들의 말을 들었으나 정확한 묘의 형상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공사 중 글자가 새겨진 방형 석물이 발견되었지만, 그 글에서 이한의 묘라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정은 이를 길조로 받아들였고, 석물이 나온 곳을 중심으로 봉분을 조성한 뒤 그 앞에 네모난 제단을 설치하였다. 의궤 도형에 해당 지점이 ‘의묘소(疑墓所)’, 곧 ‘묘소로 의심되는 곳’이라고 적힌 사실은 조성 당시에도 확정적 묘소로 단정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출전: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영건청의궤』 상, 조칙, 기해년 4월 6일 이재곤 보고; 국립전주박물관, 「조경묘와 조경단」, 15~16쪽.

 

마. 조경단의 구조와 제향

조경단은 봉분처럼 조성한 지형 앞에 제단을 둔 독특한 구조이다. 담장을 두르고 동·서·남·북에 문을 냈으며, 제단 남쪽에는 고종의 어필로 전면을 새긴 대한조경단비와 비각을 세웠다. 재실·향대청·제기고·행각 등 제향을 준비하는 부속 시설도 마련하였다.

대한제국기 조경단 제향은 해마다 한식에 한 차례 거행하였다. 축식에는 ‘시조고 선공 존령(始祖考先公尊靈)’이라고 썼고, 시조 이한만을 제향하였다. 조경묘가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함께 모신 사당인 것과 달리, 조경단은 묘제의 형식을 본떠 별도의 위패를 진설하지 않았다. 제단 뒤의 봉분이 신위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출전: 『조경단수호절목』;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영건청의궤』; 국립전주박물관, 「조경묘와 조경단」, 17~18쪽.

 

사. 조경단의 역사적 의미

조경단은 왕실의 뿌리를 목조 이안사보다 훨씬 앞선 시조 이한에게까지 연결한 상징적 공간이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황실의 오랜 역사와 정통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조경단 조성은 같은 해 삼척의 준경묘와 영경묘를 정비한 사업, 뒤이은 오목대·이목대 유적비 건립과 함께 황실 선조를 높이는 정책의 일부였다.

그러나 역사 연구에서는 정치적 의미와 묘소의 사실성을 구분해야 한다. 조경단이 국가적으로 조성되고 제향된 사실은 확실하다. 반면 그 자리가 실제 이한의 매장지라는 사실은 직접 입증되지 않았다. 조경단은 ‘확인된 고대 묘’라기보다, 오랜 전승을 토대로 대한제국이 조성한 왕실 시조의 제향 묘역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2) 대한조경단비 — 원문 전문·독음·해설

대한조경단비는 1899년(광무 3) 조경단 조성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전면의 ‘大韓 肇慶壇’은 고종이 직접 썼다. 비 뒤의 음기 역시 고종이 지었으며, 정2품 정헌대부 궁내부 특진관 윤용구가 칙명을 받들어 글씨를 썼다. 아래 원문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금석문 판독문을 기준으로 문맥에 따라 나누었다. 판독 자료 사이에 보이는 일부 이체자는 뜻이 달라지지 않는 범위에서 통용자로 정리하였다.

출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 「조경단비」, 판독 유동옥·해석 정홍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금석문 자료 「조경단비」.

 


비액

원문 大韓 肇慶壇

독음 대한 조경단

해설 대한제국의 ‘왕업의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대한’은 대한제국의 국가적 제향 시설임을 드러낸다.

 

가. 전주와 건지산의 전승

원문 國朝璿源譜略,先公墓地蓋有闕文,而全州乃國家豐沛之鄕也。慶基殿殿儀有曰:府北十里有乾止山,卽司空公墓所也。邑誌曰:乾止山,司空公墓在此。

독음 국조선원보략에 선공 묘지는 대개 빠진 글이 있으나, 전주는 곧 국가의 풍패지향이다. 경기전 전의에 이르기를, ‘부의 북쪽 십 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사공공의 묘소이다’ 하였다. 읍지에 이르기를,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가 여기에 있다’ 하였다.

해설 『국조선원보략』에는 시조 묘지에 관한 기록이 온전하지 않지만, 전주가 왕실의 고향이라는 사실과 『경기전의』·읍지의 기록을 근거로 건지산을 시조묘역으로 제시한다. ‘풍패지향’은 한 고조 유방의 고향 풍현·패현에서 유래한 말로, 왕조 창업자의 고향을 뜻한다.

 

나. 태조와 영조의 보호

원문 維我藝祖剏業之初,封其山而守護,命該道道臣奉審。及英祖朝,審驗塋域基識而無有得,因掘去傍近民塚,置監官山直,定界禁養。

독음 유아 예조 창업지초, 봉기산이 수호하고, 명해도 도신 봉심이라. 급영조조하여 심험 영역 기식이 무유득하니, 인굴거 방근 민총하고 치감관 산직하며 정계 금양이라.

해설 태조가 창업한 뒤 건지산을 보호하고 도신에게 봉심하게 했으며, 영조 때 묘역의 표지를 조사했으나 얻지 못하자 주변 민묘를 옮기고 관리자를 두어 산림을 보호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영조 때 묘의 확실한 표지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다. 옛 기록과 사라진 제향처

원문 嗚呼!殿儀與邑誌昭載兩聖朝追遠崇奉之懿式,又不啻文獻之可徵,而至今蒼梧茫茫,無所於麗牲而焄蒿焉。

독음 오호라! 전의와 읍지에 양성조 추원숭봉지 의식을 소재하였고, 우불시 문헌지가징이나, 이지금 창오망망하여 무소어 여성하고 훈호언이라.

해설 『경기전의』와 읍지에는 태조와 영조가 먼 조상을 추모하고 높여 받든 뜻이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묘소가 아득하여 희생을 매고 향을 피울 제향처조차 분명하지 않다는 탄식이다. ‘창오’는 순임금의 장지를 가리키며, 여기서는 묘소를 찾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한다.

 

라. 열성조가 시행하지 못한 까닭

원문 嗚呼!欲因以築之如堂,其事難愼,所以列聖朝未遑也歟。

독음 오호라! 욕인이 축지여당이나 기사 난신하니, 소이 열성조 미황야여.

해설 당장 묘역을 크게 조성하고 싶지만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일을 신중히 해야 했으므로 역대 임금들이 미처 시행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 1899년 봉심과 경계 설정

원문 今年春,爰遣宰臣奉審王字峯下負辰之原,俗傳有上下墓形云。四山定界,遵正宗朝封山守護節目,以量地尺量之,東西爲三千三百六十尺,南北三千五百二十尺。

독음 금년 춘에 원견 재신하여 왕자봉하 부진지원을 봉심케 하니, 속전 유상하 묘형운이라. 사산 정계는 준정종조 봉산수호절목하여 이양지척으로 양지하니, 동서는 위삼천삼백육십척이요 남북은 삼천오백이십척이라.

해설 1899년 봄 재신을 보내 왕자봉 아래 진방을 등진 언덕을 조사하였다. 그곳에는 위아래로 묘의 형상이 있다는 전승이 있었다. 정조 때의 수호 절목을 기준으로 묘역 경계를 동서 3,360척, 남북 3,520척으로 정하였다.

 

사. 영건청 설치와 조경단의 명명

원문 命設營建廳,墠而壝之於墓形之前,壇號曰肇慶。行歲一祀之禮,置守奉官二員,諸般儀節依各園例。

독음 명설 영건청하고, 선이유지어 묘형지전하며, 단호왈 조경이라. 행세일사지례하고, 치수봉관 이원하며, 제반 의절은 의각원례라.

해설 영건청을 설치하여 묘의 형상 앞에 제사 터를 닦고 담을 둘러 제단을 세운 뒤 ‘조경’이라 이름하였다.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지내고 수봉관 두 명을 두며, 의식은 왕실 원의 전례를 따르게 하였다.

 

아. 제단을 세운 뜻

원문 夫仰之蕩蕩,皆是天也,而壇而祀之,陶匏繭栗之有所,而一其誠虔也。先公衣履之藏在是,若祗全山而封之,于何寓慕焉。

독음 부앙지 탕탕은 개시천야라. 이단이사지하여 도포견율지 유소하고 이일기 성건야라. 선공 의리지장이 재시하니, 약지 전산이 봉지하면 우하 우모언이리오.

해설 하늘처럼 넓고 아득한 대상을 우러르더라도 제사를 지내려면 구체적인 장소와 예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시조의 묘가 이곳에 있다고 믿으면서 산 전체만 막연히 봉해 둔다면 후손들이 어디에 추모의 마음을 붙이겠느냐고 반문한다. ‘의리지장’은 죽은 이의 옷과 신발을 묻은 곳이라는 뜻으로 묘소를 완곡하게 이른다.

 

자. 영원한 전범

원문 自今伊始,爲子子孫孫萬億年無窮之彝典矣。惟朕小子,豈敢曰以義斟酌而爲是禮哉。列聖朝未遑之擧,若有待於今日,而亦繼述之一事耳。

독음 자금 이시하여 위자자손손 만억년 무궁지 이전의라. 유짐 소자 기감왈 이의짐작이 위시례재리오. 열성조 미황지거가 약유대어 금일이니, 이역 계술지 일사이니라.

해설 이 제사를 자손만대의 떳떳한 법으로 삼되, 고종 자신이 새 예법을 함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역대 임금이 이루지 못한 일을 계승해 완성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조경단 건립의 정당성을 역대 왕의 뜻에서 찾은 표현이다.

 

차. 완산 옛 비와 기해년의 부합

원문 完山者,府之南山,國朝姓貫也。故有碑,字皆磨泐,僅得其七,曰完山,曰己亥五月立。今年乃己亥也,壇所竣役亦五月也。天理顯晦,抑有時而符焉者如此歟。

독음 완산자는 부지 남산이요 국조 성관야라. 고유비하나 자개 마륵하여 근득기칠하니, 왈 완산이요 왈 기해오월립이라. 금년 내기해야요 단소 준역 역오월야라. 천리 현회가 억유시이 부언자 여차여.

해설 완산은 전주의 남산이며 왕실 이씨의 관향을 상징한다. 낡은 비에서 ‘완산’과 ‘기해년 5월에 세우다’라는 일곱 글자가 남았는데, 조경단도 기해년인 1899년 5월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이 우연한 일치를 하늘의 이치가 때에 맞추어 드러난 징표처럼 해석하였다.

 

카. 고종의 친제·친필

원문 碑之前面,朕所親書;其陰記,朕所親撰。蓋所以寓奉先之思爾。

독음 비지 전면은 짐소친서요, 기음기는 짐소친찬이라. 개소이 우봉선지사이니라.

해설 비 앞면의 제액은 고종이 직접 쓰고, 뒷면의 글도 직접 지었다. 선조를 받드는 마음을 비에 담았다는 뜻이다.

 

타. 건립 연기와 서자

원문 光武三年己亥五月日,正二品正憲大夫宮內府特進官臣尹用求奉勅謹書。

독음 광무 삼년 기해 오월 일, 정이품 정헌대부 궁내부 특진관 신 윤용구 봉칙 근서.

해설 1899년 5월, 정2품 정헌대부 궁내부 특진관 윤용구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삼가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다.

 


비문 전체의 핵심

조경단비는 건지산이 실제 이한의 묘임을 새롭게 증명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비문 스스로 영조 때 묘역의 표지를 찾지 못했다고 밝힌다. 비문의 논리는 ① 전주가 왕실의 고향이라는 점, ② 『경기전의』와 읍지에 건지산 시조묘 전승이 기록되었다는 점, ③ 태조와 영조가 산을 보호했다는 점, ④ 후손의 추모를 위한 구체적 제향 장소가 필요하다는 점을 근거로 조경단 건립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2) 승경원 — 선계의 빈자리를 잇는 현대 제향 공간

 


가. 승경원과 승경묘의 구분

승경원(承慶院)은 전주시 덕진구 창포길 일대에 조성된 전체 제향 공간의 이름이다. 그 안에서 위판을 봉안한 중심 사당은 승경묘(承慶廟)이다. 따라서 두 명칭은 같은 뜻이 아니다. ‘승경원’은 사당과 부속 공간을 포함한 전체 영역이고, ‘승경묘’는 실제 위판을 모시고 제향하는 사당 건물이다.

승경(承慶)은 ‘경사를 잇는다’는 뜻이다. 조경단의 ‘왕업의 경사가 비롯됨[肇慶]’을 이어받는다는 의미가 담겼다. 조경단이 시조 이한을, 승경묘가 그 뒤의 2세부터 17세까지를 제향함으로써 조선 왕실 선계의 흐름을 연결하려는 명명이다.

출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공식 홈페이지, 「승경묘제향」·「창립 및 연혁」; 승경원 준공 및 위판 봉안 관련 공식 행사 기록.

 

나. 왜 승경원이 필요했는가

전주 이씨 왕실 선조의 제향 공간은 여러 곳에 나뉘어 있다. 전주 조경묘와 조경단에서는 시조 이한을 기린다.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에서는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와 그 부인 삼척 이씨를 모신다. 함경도와 조선 왕릉·종묘에는 목조 이후의 선조와 역대 왕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조의 아들인 2세부터 이양무에 이르는 17세까지는 각 인물의 묘소가 모두 확인되어 국가 제향이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이 ‘궐사’의 구간을 보완하고 선계 전체를 한 흐름으로 기리기 위해 승경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국가가 만든 제향 시설이 아니라 현대 종중이 건립한 제향 공간이다.

 

다. 건립과 봉안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2013년경부터 승경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2021년 공사를 본격화하였다. 2023년 2월 18일 준공식과 위판 봉안식을 거행하였으며, 같은 해 4월 10일 첫 승경묘 제향을 봉행하였다. 승경묘에는 전주 이씨 시조 2세부터 17세 양무 장군까지의 조고비 위판을 봉안한다.

제향일은 조경단대제가 열리는 4월 10일과 연계되어 있다. 먼저 시조 이한을 기리고 이어 승경묘에서 2세부터 17세까지의 선조를 제향함으로써, 시조에서 선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한날에 확인하도록 구성한 것이다.

출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승경묘제향」 및 「창립 및 연혁」: 2023년 2월 18일 준공·위판 봉안, 2023년 4월 10일 첫 제향 기록.

 

라. 실록과 사료를 읽는 올바른 방법

승경원은 21세기에 건립되었으므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대한제국기 의궤에 승경원이라는 시설이 기록될 수 없다. 따라서 ‘실록에 근거한 승경원’이라고 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실록과 왕실 계보는 승경원이 제향하려는 선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자료이고, 승경원의 실제 건립 연혁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현대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

사료 구분
• 조경단의 조성: 『고종실록』, 영건청의궤, 조경단비 등 국가 사료
• 건지산 전승의 전개: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완산지』
• 선계와 계보: 『국조선원보략』 및 전주 이씨 선원 계보
• 승경원 건립: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2021~2023년 공식 기록

 

마. 승경원의 역사문화적 의미

승경원은 새로운 고대 유적이 아니다. 또한 국가가 지정한 조선시대 왕실 사당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후손들이 조경단·조경묘·준경묘·영경묘·종묘로 이어지는 제향 체계 사이의 빈 구간을 상징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세운 현대의 제향 공간이다.

그 의미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보다 ‘기억과 제향의 계승’에 있다. 조경단이 대한제국기에 시조 묘역 전승을 국가 제향 공간으로 바꾼 사례라면, 승경원은 현대 종중이 흩어진 선계의 기억을 하나의 제향 질서로 정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바. 맺음말 — 비롯된 경사와 이어지는 경사

조경단과 승경원은 시대와 조성 주체가 서로 다르다. 조경단은 1899년 대한제국 황실이 조성한 시조 제향 공간이고, 승경원은 2023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완성한 현대 제향 공간이다. 조경단비는 대한제국이 왜 건지산에 제단을 세웠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금석문이다.

조경단의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첫째, 건지산이 전주 이씨 시조묘역으로 오랫동안 전승되고 왕실의 보호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둘째, 이한의 실제 묘 위치는 영조와 고종 때의 조사에서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 두 사실을 구분할 때 조경단은 전설로만 남은 장소도,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된 무덤도 아닌, 전승과 국가 의례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역사적 공간으로 온전히 이해된다.

‘조경’이 왕업의 경사가 비롯되었음을 뜻한다면, ‘승경’은 그 경사를 이어 간다는 뜻이다. 조경단에서 시작된 시조의 기억은 승경원에서 여러 세대의 선계로 이어진다. 두 공간은 조선 왕실의 뿌리를 찾고, 그 뿌리를 오늘의 제향과 역사문화로 계승하려는 서로 다른 시대의 노력을 보여 준다.

 

주요 사료와 참고문헌

『태종실록』 권26, 태종 13년 10월 2일 무신.

『숙종실록』 권26, 숙종 19년 7월 8일 경술.

『영조실록』 권22, 영조 5년 4월 2일 병자; 권106, 영조 41년 4월 14일 기미; 영조 47년 조경묘 창건 관련 기사.

『승정원일기』 제690책, 영조 5년 윤7월 23일 을미.

『고종실록』 광무 2~3년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조성 관련 기사.

『국조선원보략』.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영건청의궤』 상·하.

『조경단수호절목』; 『전주부건지산금양절목등초』; 『완산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가유산 지식이음, 「조경단비(肇慶壇碑)」, 판독 유동옥·해석 정홍자.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조경단」.

이동희, 「조경묘와 조경단」, 국립전주박물관 조선왕릉 특별강연회 자료, 2017.

이욱, 「대한제국기 황실의 존숭과 조경단 건립」, 『근대한국종교문화의 재구성』,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이욱, 『조선왕실의 제향공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공식 홈페이지, 「승경묘제향」·「창립 및 연혁」.

 

 

 3.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 목조·익조·도조·환조가 닦은 조선 건국의 기반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동북면의 강력한 무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세대에 걸친 선조들의 이동과 세력 형성 과정이 있었다. 그 시작은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였다.

전주를 근거지로 살아가던 이씨 가문은 목조 때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이동했고, 다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의주·덕원을 거쳐 두만강 방면의 알동에 정착하였다. 이후 익조·도조·환조를 거치면서 다시 남하하여 함주와 화주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러한 이동은 단순한 거주지 변경이 아니었다. 고려인과 여진인, 그리고 원나라 세력이 교차하던 동북 변경에서 군사력과 인적 기반을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환조 이자춘 때 고려에 귀부하여 쌍성총관부 수복에 참여하면서 이씨 가문은 고려 동북면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기반을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이성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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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조 이안사 — 전주에서 삼척으로

전주의 유력 가문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다

『태조실록』 「총서」는 태조 이성계의 집안을 일컬어

「全州大姓也」

라고 기록하였다.

독음

전주 대성야.

풀이

“전주의 큰 성씨, 곧 전주 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다.”

목조 이안사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태조실록』은 그를 호방한 성품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안사의 삶은 전주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크게 바뀌었다.

『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山城別監入館, 因官妓事, 與州官有隙」

독음

산성별감 입관, 인관기사, 여주관유극.

쉬운 풀이

“산성별감이 객관에 들어왔는데, 관기와 관련된 일 때문에 지방 관리와 사이에 틈이 생겼다.”

여기서 관기(官妓)​란 관청에 소속되어 연회와 접객 등의 일을 담당하던 여성을 말한다.

전주 지방관은 안렴사와 의논하여 군사를 동원하려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실록은 이 장면을 매우 분명하게 기록한다.

「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독음

목조 문지, 수사거 강릉도 삼척현, 민원종이사자, 백칠십여가.

쉬운 풀이

“목조가 이 소식을 듣고 마침내 강릉도 삼척현으로 옮겨 살았는데, 백성 가운데 자원하여 따라 이주한 사람이 170여 가구나 되었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이안사가 개인적으로 도망하듯 전주를 떠난 것이 아니라 170여 가구가 자발적으로 그를 따라갔다 는 것이다. 당시 한 가구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규모였다.

따라서 목조는 이미 전주에서부터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지역 유력자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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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은 왜 선택했을까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간 이유와 관련하여 흔히 “삼척에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만 이 부분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태조실록』의 해당 기사에는 목조가 왜 하필 삼척을 선택했는지 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 실록에서 확실하게 확인되는 것은 전주의 지방 관리와 갈등한 뒤 삼척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다.

후대의 여러 기록에서는 삼척을 목조의 외향(外鄕)​과 관련된 곳으로 설명한다.

외향이란 일반적으로 어머니 쪽 집안과 관련된 고장 , 즉 외가 쪽 연고지를 뜻한다.

따라서 출판 원고에서는

“목조가 외가집이 있는 삼척으로 갔다.”

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후대의 관련 기록에서는 삼척이 목조의 외향과 관련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한 것으로 전한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사료에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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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서의 생활

목조는 삼척에서 상당한 기간 세력을 유지하였다.

『태조실록』은

「嘗造船十五隻以備倭」

라고 기록한다.

독음

상조선 십오척 이비왜.

풀이

“일찍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였다.”

몽골군이 여러 지역을 침략하자 목조는 두타산성(頭陀山城)​에서 난리를 피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삼척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목조가 새로운 생활 기반을 마련했던 곳이었다.

오늘날 삼척에는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와 어머니의 묘로 전하는 준경묘와 영경묘 가 있다. 다만 이 두 묘는 조선시대에도 오랫동안 문헌적 확증 여부가 논의되다가 대한제국기인 1899년에 왕실 선조의 묘로 공식 정비되었다.

 

(null)

(2) 삼척에서 의주·덕원을 거쳐 알동으로

다시 북쪽으로 길을 떠나다

목조가 삼척에서 생활하던 중 전주에서 갈등을 빚었던 바로 그 산성별감이 안렴사가 되어 다시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목조는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삼척을 떠났다.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止焉。」

독음

목조 공화급, 설가부해, 지동북면 의주 지언.

쉬운 풀이

“목조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가족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동북면의 의주에 이르러 살았다.”

여기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의주(宜州)​는 압록강가의 평안북도 의주(義州)가 아니다.

『태조실록』은 직접

「宜州 卽德源」

이라고 주석을 붙였다.

독음

의주 즉 덕원.

풀이

“의주는 곧 덕원이다.”

즉 오늘날 북한의 원산·덕원 방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null)

170여 가구도 다시 따라가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전주에서 삼척까지 따라왔던 사람들이 다시 목조와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실록은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라고 하였다.

독음

민 일백칠십여호 역종지.

풀이

“백성 170여 호도 또한 그를 따라갔다.”

목조의 세력은 동북면에 들어간 뒤 더 커졌다.

「東北之民, 多歸心焉」

독음

동북지민, 다귀심언.

풀이

“동북 지역의 백성 가운데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고려 조정도 이러한 세력을 인정하여 목조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고 고원 방면을 방어하게 하였다.

 

(null)

원나라 세력과 마주하다

당시는 몽골의 세력이 고려 동북지역으로 깊숙이 들어오던 때였다.

원나라 장수 산길이 쌍성 지역에 주둔하면서 철령 이북까지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산길은 목조에게 여러 차례 귀순을 요구하였다.

실록에서는 목조가 결국

「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하였다고 기록한다.

독음

부득이 솔김보노등 일천여호 항.

풀이

“마지못하여 김보노 등을 비롯한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여기서 1천여 호가 언급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전주를 떠날 때 170여 가였던 목조의 추종 세력이 동북면에 들어온 뒤 더욱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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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년 알동에 정착하다

목조는 이후 수로와 육로를 거쳐 북상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개원로 남경의 알동(斡東)​에 도착하여 정착하였다.

실록은 그 시점을 명확하게 기록한다.

1254년, 고려 고종 41년​이었다.

알동은 당시 두만강 방면의 중요한 군사적·행정적 거점이었다.

이듬해인 1255년 , 원나라는 목조의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알동천호소를 설치하고 목조에게 금패를 내리면서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천호란 무엇인가

천호는 원나라의 군사·행정 조직에서 일정한 호구와 군사를 통솔하는 직책이다.

다루가치란 무엇인가

다루가치는 원나라가 지방 행정과 군민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이었다.

즉 목조는 알동에 정착한 뒤 단순한 이주민 지도자를 넘어 원나라의 군사·행정 체계 속에서 지역을 통솔하는 인물 이 되었다.

 

(null)

(3) 익조와 도조 — 알동에서 다시 남쪽으로

익조 이행리, 아버지의 세력을 이어받다

1274년 목조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가 뒤를 이었다.

『태조실록』에는

「至元十二年乙亥三月, 襲職」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독음

지원 십이년 을해 삼월, 습직.

풀이

“지원 12년인 1275년 3월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즉 익조는 목조가 구축한 알동의 군사·행정 기반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null)

여진 세력과 교류하다

목조는 주변 여진 천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서로 소와 말을 잡아 잔치를 베풀고 며칠씩 함께 지내기도 했다.

익조 역시 이러한 관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조를 따르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태조실록』은

「翼祖威德漸盛」

즉

독음

익조 위덕 점성.

풀이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점 강성해졌다.”

고 기록하였다.

익조의 세력이 커지자 주변 여진 천호들은 오히려 그를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이행리는 본래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며, 장차 우리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익조를 제거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null)

알동을 떠나 다시 의주로

위기를 감지한 익조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이끌고 알동을 떠났다.

적도(赤島)​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의주, 즉 덕원 방면​에 정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 왕실 선계의 이동 방향이 크게 바뀐다.

목조가

전주 → 삼척 → 의주 → 알동

으로 북상하였다면,

익조 때부터는

알동 → 의주·덕원 → 안변 → 화주·함주

방향으로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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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익조

익조는 1281년 원나라의 일본 정벌 과정에서 합포에 갔다가 고려 충렬왕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버지 목조가 북쪽으로 간 것이 고려를 배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해명하였다.

『태조실록』에는 익조가 충렬왕 앞에서

“선친이 북방으로 간 것은 위험을 피하려 한 것이며, 감히 임금을 배반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는 뜻으로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씨 가문이 원나라의 관직을 받으면서도 고려 왕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null)

안변·화주·함주로 생활권을 넓히다

익조는 의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등주, 오늘날 안변 지역에도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화주와 함주 일대를 왕래하였다.

또 원나라로부터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을 관할하는 다루가치로 임명되면서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 무렵 이씨 가문의 활동 중심지는 점차 두만강 일대에서 함경남도 방면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null)

(4) 도조 이춘 — 함주를 새로운 세력의 중심으로

익조의 뒤를 이은 사람이 도조(度祖) 이춘(李椿)​이다.

도조는 원나라의 명을 받아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도조 시대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함주가 이씨 가문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 이었다.

익조 때부터 알동 사람 가운데 남쪽으로 이동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익조는 이들을 함주 지역에 정착시켰다.

『태조실록』은 함주의 자연환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咸州土地平衍沃饒」

독음

함주 토지 평연옥요.

쉬운 풀이

“함주의 땅은 평탄하고 넓으며 비옥하였다.”

익조는 알동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함주의 여러 지역에 살게 하였다.

도조 역시 함주를 중요하게 보았다.

실록은 도조가 함주로 옮긴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알동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백성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기 때문 이고,

둘째, 목축에 편리했기 때문 이었다.

이것은 이후 이씨 가문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북 변경에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말과 가축이 중요했고, 사람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농경지 또한 필요하였다.

함주는 두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도조 시대에 이르러 이씨 가문은 이동하는 북방 세력에서 벗어나 함주를 중심으로 상당한 토지와 주민, 말과 군사력을 보유한 지역 세력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도조는 이후 화주에도 거주하였다. 『태조실록』은 도조가 첫 부인 박씨가 세상을 떠난 뒤 화주로 옮겨 살면서 쌍성총관의 딸 조씨와 혼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혼인 관계도 이씨 가문이 동북면의 유력 세력과 관계망을 넓히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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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환조 이자춘 — 원의 지방 세력에서 고려의 핵심 무장으로 환조의 등장

도조의 아들 가운데 조선 건국과 직접 연결되는 인물이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이다.

이자춘은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받아 화주·함주·쌍성 일대의 유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명목상으로는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 의 영향권에 있었다.

쌍성총관부는 고려 고종 때 몽골이 철령 이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설치한 통치기구였다.

그러나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고려 공민왕이 적극적인 반원 정책과 영토 회복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null)

공민왕과 이자춘

공민왕은 동북면의 사정을 잘 알고 그 지역에서 실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자춘을 중요하게 보았다.

『태조실록』에는 공민왕이 환조에게

「卿且歸, 鎭吾民」

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독음

경차귀, 진오민.

풀이

“경은 우선 돌아가서 우리 백성을 안정시키라.”

이 기록은 이자춘이 당시 쌍성 지역의 주민들을 실제로 통솔하고 안정시킬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null)

1356년, 쌍성총관부를 되찾다

1356년, 공민왕은 본격적으로 쌍성총관부 수복에 나섰다.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에게 군사를 주어 쌍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인우의 군대는 쌍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등주에 머물면서 쉽게 진격하지 못하였다.

공민왕은 이때 이자춘에게 비밀리에 내응하도록 명령하였다.

환조는 즉시 군사를 움직였다.

『태조실록』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與仁雨合兵, 攻破雙城」

독음

여인우 합병, 공파쌍성.

쉬운 풀이

“유인우와 군사를 합하여 쌍성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이 전투로 쌍성 일대의 원나라 세력은 무너졌다.

실록은 화주·등주·정주·장주·예주·고주·문주·의주와 여러 진, 그리고 함주 이북의 넓은 지역을 수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이 지역은 고려 고종 때 원나라에 빼앗긴 뒤 99년 만에 되찾은 것 이라고 적고 있다.

공민왕은 공을 세운 이자춘을 대중대부 사복경 으로 승진시키고 개경에 집까지 내려주었다.

이 사건은 조선 왕실 선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목조 이후 원나라의 군사·행정 체계 속에서 성장했던 이씨 가문이 이제는 고려 왕조의 핵심 군사세력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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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환조에서 이성계로 — 조선 건국으로 이어진 힘

환조 이자춘은 이후에도 고려의 장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의 군사력과 지역 기반은 아들 이성계 에게 이어졌다.

이성계는 1335년 동북면에서 태어났다.

이성계가 성장한 동북면은 일반적인 고려의 지방 사회와는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고려인과 여진인이 함께 살았고, 오랜 기간 원나라의 행정체계가 존재했으며, 말을 이용한 기병 전술과 활쏘기가 생활 속에서 익숙한 지역이었다.

이성계는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이성계가 훗날 뛰어난 기마 전술과 궁술을 바탕으로 고려 말 최고의 무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그의 개인적 능력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뒤에는 목조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축적된 인적 기반, 군사력, 토지, 말, 변경지역의 통치 경험과 정치적 관계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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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네 세대의 이동을 한눈에 보다

조선 왕실 선계의 이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주
→ 목조 이안사의 본거지
→ 전주 지방 관리와 갈등

삼척
→ 170여 가가 함께 이주
→ 왜구 방비를 위해 배 15척 건조
→ 두타산성에서 몽골군의 침입을 피함
→ 후대 기록에서는 목조의 외향과 관련된 곳으로 전함

의주(宜州·덕원)
→ 목조가 가족과 추종세력을 이끌고 해로로 이동
→ 고려가 의주병마사로 임명

알동(斡東)
→ 1254년 목조 정착
→ 1255년 수천호·원나라 다루가치가 됨
→ 두만강 일대에서 군민을 관할

익조 이행리
→ 목조의 관직과 세력 계승
→ 주변 여진 천호들과 교류
→ 세력이 커지자 견제를 받아 알동에서 남하
→ 의주·안변·화주·함주 방면으로 활동 영역 확대

도조 이춘
→ 익조의 기반 계승
→ 함주의 비옥한 토지와 목축 환경을 활용
→ 알동에서 내려온 주민을 정착시킴
→ 함주·화주를 이씨 가문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듦

환조 이자춘
→ 화주·함주·쌍성 지역의 세력 계승

→ 1355년 이선계 출생(원나라 쌍성총관부 지역)
→ 공민왕과 협력
→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에 결정적 역할
→ 고려의 공식 군사세력으로 편입

이성계
→ 환조의 동북면 군사·인적 기반을 계승
→ 고려의 장군으로 성장
→ 1392년 조선을 건국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표시하면,

전주 → 삼척 → 의주(덕원) → 알동 → 다시 의주·안변 → 함주·화주 → 쌍성 → 이성계

가 된다.

 

(null)

맺음말

이동의 역사가 조선 건국의 기반이 되다

조선의 건국을 이해하려면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사건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약 한 세기 이상 앞서 시작된 선조들의 이동 과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지방 관리와의 갈등으로 삶의 터전을 떠났지만, 그를 따라 170여 가구가 함께 움직였다. 삼척을 거쳐 의주에 도착한 뒤에는 동북면 주민들까지 그를 따랐고, 원나라 세력권에 들어가 알동의 수천호와 다루가치가 되면서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익조 이행리는

이 세력을 물려받아 여진 천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주변 세력의 견제가 심해지자 알동을 떠나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의주·안변·화주·함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도조 이춘은

함주의 비옥한 토지와 목축에 유리한 환경을 바탕으로 알동에서 내려온 주민들을 정착시키면서 이씨 가문의 세력을 안정시켰다.

 

환조 이자춘 때 중요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공민왕의 영토 회복 정책에 협력하여 1356년 쌍성총관부를 수복함으로써 이씨 가문은 원나라의 지방 군사세력에서 고려 왕조의 핵심적인 동북면 세력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축적된 힘을 물려받은 사람이 이성계였다.

따라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한 개인의 갑작스러운 성공이 아니었다.

목조에서 익조·도조·환조로 이어지는 여러 세대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다시 동북 변경으로 이동하며 사람과 토지, 말과 군사력, 지역 통치 경험을 축적한 결과가 이성계에게 계승된 것​이었다.

전주에서 시작된 작은 이동은 결국 삼척과 동북면, 알동과 함주·화주를 거쳐 고려 말의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긴 여정의 마지막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장군으로 성장하여 1392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 순간, 여러 세대에 걸친 전주 이씨 선조들의 이동과 개척의 역사는 새로운 왕조, 조선 의 역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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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 따라 반드시 구별해야 할 사항

 

① 확실한 사실

『태조실록』에 직접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목조가 전주 지방 관리와 갈등하였다.

목조가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170여 가구가 자발적으로 따라갔다.

목조가 삼척에서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였다.

목조가 삼척에서 의주·덕원으로 이동하였다.

170여 호가 다시 따라갔다.

1254년 알동에 정착하였다.

1255년 원나라의 수천호·다루가치가 되었다.

익조가 관직을 계승하였다.

익조가 알동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익조·도조가 알동에서 내려온 주민들을 함주에 정착시켰다.

환조 이자춘이 공민왕의 명을 받아 쌍성총관부 수복에 참여하였다.

 

② 후대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야 할 사항

“삼척이 목조의 외가가 있었던 곳이다.”

라는 이야기는 『태조실록』의 전주→삼척 이주 기사에는 직접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책에서는

“삼척은 후대 기록에서 목조의 외향과 관련된 지역으로 전한다.”

 

③ 핵심 1차 사료

『태조실록』 권1 「총서」 제1기사
— 목조 이안사의 전주→삼척→의주→알동 이동.

『태조실록』 권1 「총서」 제2기사
— 목조의 알동천호소 수천호·다루가치 임명.

『태조실록』 권1 「총서」 제7~9기사
— 익조의 관직 계승과 알동에서의 남하.

『태조실록』 권1 「총서」 제16기사
— 익조·도조의 함주 정착과 함주의 자연환경.

『태조실록』 권1 「총서」 제24~25기사
— 공민왕과 환조 이자춘,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4. 조선 왕실의 뿌리를 품은 준경묘와 영경묘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미로면에는 조선 왕실의 뿌리와 관련된 두 묘소가 있다.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이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로 전하는 이양무(李陽茂)​의 묘이고, 영경묘는 그의 부인인 삼척 이씨(三陟李氏)​의 묘이다. 이양무는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이므로 태조 이성계에게는 5대조가 된다.

그러나 이 두 묘가 처음부터 조선 왕실의 공식 선조 묘로 정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 조사와 봉심이 이루어졌지만 확실한 고증을 중시하여 공식적인 묘제 정비에는 신중하였다.

마침내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 고종이 다시 조사하게 한 뒤 두 묘소를 왕실 선조의 묘로 공식 정비하면서, 노동(蘆洞)의 묘를 ​준경묘 , 동산(東山)의 묘를 ​영경묘 라 이름하였다. 『고종실록』은 당시 조정이 『선원보략』뿐 아니라 『여지승람』과 읍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두 묘소를 다시 확인했음을 전한다.

따라서 준경묘와 영경묘는 단순한 전주 이씨 선조의 묘를 넘어, 대한제국 황실이 역사적 고증을 거쳐 공식적으로 정비한 조선 왕실 선계의 상징적 공간 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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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경묘 — 조선 왕실 선계의 뿌리를 찾아서

준경묘의 주인 이양무

 


준경묘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에 자리한다.

이곳에 묻힌 것으로 전하는 이양무 는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이다.

계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양무 → 목조 이안사 → 익조 이행리 → 도조 이춘 → 환조 이자춘 → 태조 이성계

따라서 이양무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가 된다.

이 묘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 왕조의 건국자인 이성계보다 다섯 세대 앞선 선조의 묘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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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확인과 논의가 계속된 묘

준경묘를 설명할 때 중요한 점은 이곳을 조선 건국 직후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이양무의 묘로 확정하여 관리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 왕실은 선대의 묘를 확인하는 문제에 상당히 신중하였다.

후대에 여러 차례 봉심과 수축 논의가 있었지만 확실한 근거를 확인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1900년 『고종실록』에 매우 잘 나타난다.

고종은 준경묘와 영경묘의 영건을 담당한 이중하를 만난 자리에서 두 묘소를 그동안 제대로 수호하지 못한 것은

“열성조의 신중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 말하였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앞선 왕들이 두 묘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방치한 것이 아니라, 왕실 선조의 묘로 공식 확정하는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해 왔다 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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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준경묘라는 이름을 얻다

결정적인 변화는 대한제국 고종 때 일어났다.

1899년 고종은 삼척의 두 묘에 대한 봉심과 고증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5일 조령을 내렸다.

『고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陟蘆洞、東山兩墓,旣載於《璿源譜略》」

독음

삼척 노동·동산 양묘, 기재어 『선원보략』.

쉬운 풀이

“삼척의 노동과 동산에 있는 두 묘는 이미 『선원보략』에 실려 있다.”

고종은 이어 『여지승람』과 읍지에도 근거가 있으며 역대 왕들도 여러 차례 봉심하도록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노동에 있는 묘를

濬慶墓 — 준경묘

동산에 있는 묘를

永慶墓 — 영경묘

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준경묘와 영경묘라는 명칭의 공식적인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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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선조의 묘로 정비하다

묘의 이름만 붙인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묘역을 본격적으로 정비하였다.

1899년 7월에는 이근명(李根命)​을 준경묘 비문 서사관으로 임명하고, 민병석(閔丙奭)​을 영경묘 비문 서사관으로 임명하였다.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우며 제향과 수호를 위한 제도도 마련하였다.

1900년 고종은 두 묘소를 수호하는 데 필요한 토지와 재원 문제까지 논의하였다.

따라서 1899년의 정비는 단순한 묘소 보수가 아니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조선 왕실의 선계를 다시 확인하고 그 뿌리를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한 사업 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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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준경묘의 풍수적 해설

왜 준경묘를 명당이라고 했을까?

준경묘에는 오래전부터 “왕을 낳은 명당”​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풍수적으로 명당이라는 평가와 이성계가 실제로 조선을 건국한 역사적 원인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풍수는 산과 물, 지형의 흐름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해석했던 전통적인 공간관이다.

따라서 준경묘의 풍수는 “이 묘 때문에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고 역사적 인과관계로 설명하기보다, 옛사람들이 이 묘역의 자연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선 건국 이후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라는 문화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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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겹겹이 감싸는 형세

준경묘는 두타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안쪽 깊은 곳에 자리한다.

전통 풍수에서는 묘 뒤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중요하게 보았다.

묘의 뒤를 받쳐 주는 산세가 안정되고 좌우의 산줄기가 묘역을 감싸며 앞쪽으로 시야가 열리는 지형을 좋은 묘터로 평가하였다.

준경묘 역시 주변의 산줄기가 묘역을 여러 겹으로 감싸고 있는 형세로 설명되어 왔다.

전통적인 풍수 용어로 표현하면 묘 뒤의 산세를 주산(主山) 또는 현무에 비유하고, 좌우에서 감싸는 산줄기를 ​청룡(靑龍)·백호(白虎), 묘 앞에서 마주하는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한다.

즉 묘를 중심으로 산줄기가 사방에서 보호하듯 둘러싸인 지형을 길지로 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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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말하는 ‘장풍득수’

풍수의 기본적인 원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흔히

장풍득수(藏風得水)

라고 한다.

독음

장풍득수.

뜻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

거센 바람이 직접 들이치지 않도록 산이 둘러싸고 있으면서 주변의 물이 적절히 모이고 흘러가는 지형을 좋은 터로 보았다는 의미이다.

준경묘가 자리한 곳 역시 산줄기가 주변을 감싸 외부의 강한 바람을 막아 주는 형태이고 계곡과 물길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이 전통 풍수의 관점에서 준경묘를 좋은 묘터로 평가하게 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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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의 전설 — 백우금관

준경묘의 풍수적 명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백우금관(百牛金棺) 전설​이다.

전승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목조 이안사가 아버지 이양무의 묘 자리를 찾기 위해 산속을 다니던 중 한 도승이 이곳을 보고

“참으로 큰 명당이다. 이곳에 묘를 쓰면 후대에 왕이 나올 것이다.”

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장례를 치를 때 **소 백 마리〔百牛〕**를 제물로 쓰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안사에게는 그만한 재력이 없었다.

그래서 숫자 ‘일백 백(百)’과 ‘흰 백(白)’의 소리가 같은 점에 착안하여 **소 백 마리〔百牛〕 대신 흰 소 한 마리〔白牛〕**를 사용하고, 금빛을 띠는 짚으로 금관을 대신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훗날 이양무의 5대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도승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삼척시립박물관의 연구자료 역시 이 이야기를 삼척 지역에 전승된 백우금관 명당 설화 로 소개하면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결합하여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신화적으로 설명하는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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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금관은 역사적 사실인가

여기서는 반드시 역사와 전설을 구분해야 한다.

『태조실록』 「총서」에는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도승에게 묏자리를 얻고 백우금관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백우금관 이야기를 『태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처럼 서술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는 후대의 『삼척군지』를 비롯한 지역 자료에 전승된 풍수 설화 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척시립박물관 연구자료에서도 『삼척군지』에 전하는 도승 이야기를 별도의 전설로 소개한다.

그럼에도 이 전설은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성계가 실제로 조선을 건국한 뒤 사람들은 그의 선조 묘가 특별한 곳이었기 때문에 왕이 나왔다는 설명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즉 백우금관 전설은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선조의 묘와 연결하여 설명하려는 후대 사람들의 역사 인식과 왕조의 기원 의식 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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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 풍수의 의미

따라서 준경묘의 풍수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준경묘가 산줄기에 둘러싸인 안정적인 자연환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실제 지형적 특징이다.

그 지형을 청룡·백호·주산·안산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길지로 평가한 것은 전통 풍수의 해석 이다.

그리고 그곳에 묘를 쓴 결과 5대 뒤에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백우금관 전설 이다.

이 세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실제 지형 → 풍수적 해석 → 왕조 건국 전설

이렇게 단계적으로 이해하면 준경묘의 역사와 풍수를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그 문화적 의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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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경묘 — 조선 왕실의 또 하나의 선대 묘

목조 이안사의 어머니가 잠든 곳

준경묘와 함께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곳이 영경묘(永慶墓)​이다.

영경묘는 삼척 미로면 동산 일대에 있으며, 목조 이안사의 어머니이자 이양무의 부인인 삼척 이씨 의 묘로 전한다.

즉 준경묘와 영경묘는 서로 별개의 왕실 선조를 모신 것이 아니라 부부의 묘 이다.

계보상으로 보면

이양무 ─ 삼척 이씨
    │
   목조 이안사
    ↓
   익조
    ↓
   도조
    ↓
   환조
    ↓
   태조 이성계

로 이어진다.

따라서 두 묘는 함께 보아야 조선 왕실 선계의 의미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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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와 떨어져 조성된 영경묘

영경묘는 준경묘와 같은 봉분 안에 조성된 합장묘가 아니다.

부부가 서로 다른 장소에 묻힌 별묘 형태 이다.

이는 당시의 장례 관행과 묘지 선택에서 각각의 묘터를 중요하게 고려했던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묘가 현재의 위치에 조성된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후대 전승이 많으므로 확실한 문헌적 사실과 구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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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영경묘로 공식 명명되다

영경묘 역시 준경묘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고종 때 중요한 전환을 맞았다.

1899년 고종은 삼척 노동과 동산의 두 묘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받았다.

『고종실록』은 두 묘가 『선원보략』에 실려 있고 『여지승람』과 읍지에도 증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고종은 동산의 묘를

永慶墓

라고 명명하였다.

독음

영경묘.

의미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길이 경사로움이 이어지는 묘”​라는 뜻을 지닌다.

준경묘와 영경묘라는 이름에는 왕실의 먼 선조를 추모하고 그 계통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는 황실의 뜻이 담겨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null)

비문을 쓰게 하다

고종은 묘를 공식적으로 정비하면서 비석도 세우도록 하였다.

1899년 7월 11일 『고종실록』에는

「學部大臣閔丙奭爲永慶墓碑文書寫官」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독음

학부대신 민병석 위 영경묘 비문 서사관.

쉬운 풀이

“학부대신 민병석을 영경묘 비문을 쓰는 관리로 삼았다.”

준경묘 비문은 이근명이, 영경묘 비문은 민병석이 맡았다.

이는 두 묘가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적인 선대 묘로 정비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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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준경묘와 영경묘의 역사적 의미

준경묘와 영경묘의 가치는 단순히 태조 이성계의 먼 선조가 묻혀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두 묘는 전주를 떠난 이씨 가문이 삼척을 거쳐 동북면으로 이동하기 직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 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다시 삼척을 떠나 동북면 의주·덕원을 거쳐 알동으로 이동하였다.

그 뒤 익조·도조·환조를 거치면서 이씨 가문은 동북면의 강력한 군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마침내 환조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 말의 대표적인 장군으로 성장하여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따라서 삼척의 준경묘와 영경묘는 이 긴 이동 과정의 출발점에 자리한다.

이를 흐름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주
↓
삼척 — 준경묘·영경묘
↓
의주(덕원)
↓
알동
↓
다시 의주·안변
↓
함주·화주
↓
환조 이자춘
↓
태조 이성계
↓
1392년 조선 건국

이렇게 보면 준경묘와 영경묘는 단순한 두 개의 묘소가 아니다.

전주 이씨 가문이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역사를 연결해 주는 공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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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 역사와 전설이 함께 살아 있는 왕실의 뿌리

준경묘와 영경묘에는 역사와 전설이 함께 존재한다.

준경묘를 왕이 나오는 천하의 명당으로 설명하는 백우금관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태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반면 삼척의 두 묘가 오래전부터 이양무 부부의 묘로 전해졌으며 조선 왕실에서 여러 차례 봉심과 수축을 논의했고, 마침내 1899년 고종이 『선원보략』·『여지승람』·읍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준경묘와 영경묘라는 이름을 내리고 공식적으로 정비했다는 사실은 사료로 확인된다.

따라서 준경묘를 이해할 때에는 세 가지 층위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역사이다.
이양무와 그 부인의 묘로 전승되어 왔고 대한제국 황실이 이를 조사하여 공식적으로 정비한 역사이다.

둘째는 풍수이다.
산이 묘역을 감싸고 물길이 형성된 자연환경을 전통적인 풍수 개념으로 해석하여 명당으로 평가한 것이다.

셋째는 전설이다.
목조 이안사가 도승에게 명당을 얻어 백우금관으로 아버지를 장사지냈고, 그 결과 5대 뒤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승은 『삼척군지』 등 후대 지역 자료에 나타나며, 오늘날에는 조선 건국의 기원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삼척 지역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 사실과 풍수적 해석, 그리고 후대의 전설을 서로 혼동하지 않고 바라볼 때 준경묘와 영경묘의 의미는 오히려 더욱 분명해진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조선 건국을 풍수 하나로 설명하는 장소가 아니라, 전주를 떠난 이씨 가문이 삼척을 거쳐 동북면으로 이동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성장하여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기까지의 긴 역사를 상징하는 ‘조선 왕실 선계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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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료 및 참고자료

1차 사료: 『고종실록』 고종 36년(1899) 5월 25일 — 삼척 노동·동산의 두 묘를 준경묘·영경묘로 명명한 기사.

『고종실록』 고종 36년(1899) 7월 11일 — 이근명을 준경묘 비문 서사관, 민병석을 영경묘 비문 서사관으로 임명한 기사.

『고종실록』 고종 37년(1900) 1월 13일 — 고종이 두 묘소를 그동안 수호하지 못한 것이 역대 왕들의 신중한 뜻이었다고 밝히고, 수호 재원을 논의한 기사.

관련 사료: 『선원보략』,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삼척 읍지류, 『조경단·준경묘·영경묘 영건청의궤』.

전설·향토자료: 『삼척군지』의 준경묘·백우금관 관련 전승. 삼척시립박물관 연구자료는 이 전설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신화적으로 설명하는 삼척 지역의 건국 설화로 해석하고 있다.

사료 신뢰도 구분

확실: 1899년 고종이 봉심 결과와 『선원보략』·『여지승람』·읍지 등의 근거를 들어 두 묘를 준경묘·영경묘로 공식 명명하고 정비하였다.

전통적 해석: 준경묘의 산세를 주산·청룡·백호·안산·장풍득수 등의 풍수 개념으로 해석하여 길지로 평가하는 견해.

전승: 도승이 묏자리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 소 백 마리를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을 금빛 짚으로 대신했다는 ​백우금관 설화 . 이는 『태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로 구별해야 한다.

 

  

조선의 건국

5.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즉위, 그리고 한양 천도

- 고려의 장수에서 새 왕조의 창업 군주로

 

집필 기준

이 글은 『태조실록』과 『고려사』를 중심으로 조선 건국의 정치적 과정, 1392년 수창궁 즉위의 실제 모습, 국호 제정과 1394년 한양 천도를 차례로 살핀다. 실록의 서술은 새 왕조가 편찬한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기록된 사실과 그 기록이 내세운 정당화 논리를 구분해 읽었다.



 


한눈에 보는 주요 연표

연도

사건

의미

1388

위화도 회군

이성계가 군사·정치의 중심으로 부상

1389

공양왕 즉위

개혁 세력이 정국을 주도

1391

과전법 시행

새 왕조의 경제 기반 정비

1392.7.12

공양왕 폐위

왕대비 교서의 형식으로 왕위 교체

1392.7.17

수창궁 즉위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름

1393.2.15

국호 ‘조선’ 확정

명 예부의 자문이 도착

1394.10.25

한양 천도

국왕과 조정이 한양으로 이동

1395

종묘·사직·경복궁 조성

새 왕도의 상징과 통치 공간 완성

 

(1) 고려 말, 새 왕조가 태어난 배경

14세기 후반의 고려는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뒤에도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와 농장 확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재정의 궁핍이 이어졌다.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했으나 1374년 갑작스럽게 죽은 뒤 왕위의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까지 겹쳤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쳐 명성을 얻은 동북면 출신 장수 이성계가 중앙 정치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388년(우왕 14), 고려 조정은 명이 철령 이북의 영유를 주장하자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점,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점, 장마철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전염병이 생길 수 있는 점 등을 들어 출병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내려지자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진군한 뒤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위화도 회군이다.

회군은 단순한 군사 작전의 중단이 아니었다. 최영 세력이 제거되고 우왕이 물러났으며, 이성계·조준·정도전 등 개혁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1389년 창왕도 폐위되고 왕씨인 공양왕이 즉위하였다. 이 시기 개혁 세력은 토지 지급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1391년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과전법은 관리층을 새 체제에 결속시키고 국가 재정을 회복하려는 정책으로, 정치적 왕조 교체에 앞서 경제적 기반을 바꾼 조치였다.

다만 위화도 회군에서 조선 건국까지의 과정이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회군 뒤에도 고려 왕실을 유지한 채 개혁하려는 세력과 새 왕조를 세우려는 세력이 맞섰으며, 정몽주가 제거된 1392년 봄 이후에야 왕조 교체가 급속히 현실화되었다.

 

(2) 공양왕 폐위와 조선 건국

1392년 7월 12일, 배극렴 등은 왕대비에게 공양왕을 폐위해 달라고 청하였다. 왕대비의 교서가 내려지자 공양왕은 원주로 물러났고, 국새는 왕대비전에 두어졌다. 이어 왕대비는 이성계에게 국정을 임시로 맡겼다. 형식상으로는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왕대비가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에게 정권을 넘기는 절차를 취한 것이다.

원문 | 今王昏暗,君道已失,人心已去,不可爲社稷生靈主,請廢之。

독음 | 금왕 혼암, 군도 이실, 인심 이거, 불가 위 사직 생령주, 청 폐지.

뜻 | “지금 임금은 어둡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인심이 떠났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폐위하기를 청합니다.” 새 왕조 편찬 기록이 제시한 폐위 명분이다.

출전 |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첫 번째 기사(1392)

이 문장은 당시 신료들이 내세운 정치적 명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객관적 사실의 전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태조실록』은 조선 건국 뒤에 편찬되었으므로,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 즉위를 정당화하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인심이 떠났다”는 표현은 당시 권력 교체 세력의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3) 수창궁에서 이루어진 즉위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실록은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문무 신료와 한량·기로들이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집으로 몰려가 즉위를 거듭 청했다고 기록한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신료들이 안뜰까지 들어와 국새를 놓고 간절히 권한 뒤에야 수창궁으로 향하였다.

원문 | 十七日丙申,太祖卽位于壽昌宮。

독음 | 십칠일 병신, 태조 즉위 우 수창궁.

뜻 | “17일 병신일에 태조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출전 |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첫 번째 기사

수창궁에 도착한 이성계는 궁문 서쪽에서 영접하는 백관 앞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어좌에 앉지 않고 기둥 안쪽에 서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즉위식을 마친 뒤에는 고려의 중앙과 지방 관리들에게 종전대로 직무를 보게 하고 자신의 사저로 돌아갔다.

원문 | 太祖下馬步行,入殿卽位,避御座立楹內,受群臣朝賀。

독음 | 태조 하마 보행, 입전 즉위, 피 어좌 입 영내, 수 군신 조하.

뜻 | “태조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각에 들어가 즉위하였으나, 어좌를 피하여 기둥 안에 서서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았다.”

출전 |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첫 번째 기사

이 대목은 태조의 즉위가 오늘날 흔히 떠올리는 화려한 ‘대관식’과 달랐음을 보여 준다. 당시 기록의 중심은 왕관을 쓰는 의식이나 대규모 행렬이 아니라, 국새의 봉정, 신료들의 권진, 수창궁에서의 즉위와 조하에 있었다. 태조가 어좌를 피하고 즉위 뒤 사저로 돌아간 모습은 새 임금이 왕위를 억지로 받아들였다는 겸양의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였다.

또 하나 주의할 점은 즉위 당일 곧바로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바뀐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태조의 즉위로 새 왕조는 출범했지만, 한동안 국호는 고려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4) 즉위교서가 밝힌 새 정치의 방향

태조는 즉위 직후 교서를 내려 새 정권의 통치 원칙을 밝혔다. 교서에는 형벌을 신중히 하고, 억울한 옥사를 살피며,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관리 제도와 토지 제도를 정비하려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건국이 단순히 왕 한 사람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운영 원리를 다시 세우는 일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새 정권은 고려의 모든 제도를 한꺼번에 없애지 않았다. 즉위 당일 기존 관리들에게 그대로 업무를 보게 했고, 다음 날에는 고려 제도의 연혁과 장단점을 조사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제도와 인력을 상당 부분 이어받되, 새 정치 이념과 현실에 맞게 고쳐 나가는 방식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단절과 계승이 함께 이루어진 정치 변화였다.

 

(5) 국호 ‘조선’의 제정

태조는 명나라에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두 이름을 제시하여 새 국호의 선택을 요청하였다. 명 태조는 고조선 이래의 이름과 연결되는 ‘조선’을 택하였다. 1393년(태조 2) 2월 15일 명 예부의 자문이 도착하면서 국호가 조선으로 확정되었다.

국호를 명에 문의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새 왕조의 승인을 안정적으로 얻으려는 외교 절차였다. 그렇다고 명이 조선 왕조를 세웠다는 뜻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1392년 7월 태조가 즉위하여 새 정권이 출범했고, 국호와 왕의 책봉을 둘러싼 교섭은 그 뒤 별도로 진행되었다. 태조는 1393년 3월 국호 확정 뒤 도읍 개경의 이름도 ‘개성부’로 고쳤다.

원문 | 東夷之號,惟朝鮮之稱美……可更其國號曰朝鮮。

독음 | 동이 지호, 유 조선 지칭미……가 경 기국호 왈 조선.

뜻 | “동이의 이름 가운데 오직 조선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고칠 수 있다.”

출전 |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첫 번째 기사(명 예부 자문)

 

(6) 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는가?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392년 8월 13일 도평의사사에 한양 천도를 명하였다. 개경은 약 500년 동안 고려 왕조의 정치 기반이었으므로, 새 왕조가 구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치 질서를 세우려면 새 도읍이 필요했다. 한양은 한강을 통한 수운이 편리하고 국토의 중앙부에 가까웠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도 유리하였다. 풍수지리와 도참 역시 당시 도읍 선정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원문 | 敎都評議使司移都漢陽。

독음 | 교 도평의사사 이도 한양.

뜻 |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게 하였다.”

출전 |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 8월 13일 임술, 두 번째 기사

그러나 천도는 곧바로 실행되지 않았다. 신료들의 반대와 후보지 논의가 이어졌고, 1393년에는 계룡산 아래에서 새 도읍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수운이 불편하고 국토 남쪽에 치우쳤다는 하륜 등의 지적에 따라 중단하였다. 이후 무악과 한양을 다시 검토한 끝에 한양이 최종 선택되었다. 따라서 “1392년 천도 명령”과 “1394년 실제 천도”를 구분해야 한다.

 

(7)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다

태조는 1394년 8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종묘에 천도를 고하였다. 같은 해 10월 25일 개경을 출발한 태조와 조정은 한양으로 들어왔다. 당시에는 새 궁궐이 완성되지 않아 옛 한양부의 객사 등을 임시 처소로 사용하였다. 천도는 완성된 도시로 들어간 행사가 아니라, 먼저 국왕과 정부가 이동한 뒤 왕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원문 | 告于宗廟,遂定漢陽爲都。

독음 | 고 우 종묘, 수 정 한양 위도.

뜻 | “종묘에 고하고 마침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출전 |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8월 24일 기사

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송도의 터는 지기가 오래되어 쇠하고, 화산 남쪽은 지세가 좋다”는 일관의 보고를 듣고 신하들과 의논한 뒤 종묘에 고유하고 10월 25일 천도했다고 설명하였다. 이 기록은 풍수적 판단을 강조하지만, 실제 천도에는 새 왕조의 권위 확립, 구세력과의 거리 두기, 교통과 군사적 조건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였다.

 

(8) 종묘·사직과 경복궁―왕도의 완성

한양 천도 뒤 가장 먼저 추진한 핵심 공사는 종묘와 사직, 궁궐, 성곽이었다. 종묘는 왕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곳이고,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하는 국가 제단이다. 궁궐은 국왕이 거처하며 정사를 듣는 곳이었다. 이 세 시설은 왕조의 혈통, 국가의 영토와 백성, 현실의 통치를 각각 상징하였다.

1394년 12월 4일 새 도성의 종묘와 궁궐 공사를 시작하였다. 1395년 종묘와 새 궁궐이 완성되었고, 정도전은 궁궐을 ‘경복궁’이라 이름 지었다. ‘경복(景福)’은 『시경』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가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 정도전은 근정전·사정전·강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도 지어, 부지런한 정치와 깊은 성찰, 임금의 평안을 건축 공간에 담았다.

원문 | 新宮曰景福,燕寢曰康寧殿……又其南曰勤政殿。

독음 | 신궁 왈 경복, 연침 왈 강녕전……우 기남 왈 근정전.

뜻 | “새 궁궐은 경복궁이라 하고, 임금의 침전은 강녕전이라 하며……그 남쪽 전각은 근정전이라 하였다.”

출전 |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7일 기사

도성의 공간 배치는 유교적 왕도 이념을 드러냈다. 궁궐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 서쪽에는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육조 관청과 시전, 도로와 성곽이 차례로 정비되면서 한양은 조선의 정치·행정·의례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다만 이 모든 시설이 1394년 천도와 동시에 완성된 것은 아니며, 태조대의 기초 위에 후대까지 계속 보완되었다.

 

(9)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미

조선 건국은 1392년 7월 17일 하루의 즉위식만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치 권력이 재편되고, 공양왕대의 개혁과 과전법으로 새 질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공양왕 폐위와 수창궁 즉위를 거쳐 새 왕조가 출범하였다. 이어 국호 ‘조선’이 확정되고 한양 천도와 종묘·사직·경복궁 건설이 이루어지면서 왕조의 이름과 수도, 의례와 통치 공간이 갖추어졌다.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무장으로 성장했지만, 왕조 건설은 그 한 사람만의 업적은 아니었다. 조준은 토지 개혁과 제도 정비에, 정도전은 통치 이념과 국가 체제 및 한양의 왕도 설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수많은 관료와 군인, 장인과 백성의 노동도 새 수도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조선 건국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여러 정치 세력과 사회적 변화가 결합해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조선이 고려의 모든 것을 지우고 처음부터 새로 만든 나라는 아니었다. 관료제와 행정 조직, 문화적 전통의 상당 부분을 계승하면서 토지 제도와 정치 이념, 국가 의례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바로 이 ‘계승 속의 변화’가 조선 건국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맺음말

수창궁의 즉위는 화려한 대관식이라기보다 신료들의 추대와 국새의 봉정, 조하를 중심으로 한 권력 이양의 의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뒤에도 기존 관리들에게 업무를 계속하게 하며 급격한 행정 공백을 피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여러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종묘·사직과 경복궁을 세운 일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라 새 왕조의 정통성과 유교적 국가 질서를 공간에 새긴 작업이었다.

결국 조선 건국은 왕의 교체, 제도의 개혁, 국호의 확정, 수도의 이전이 단계적으로 맞물린 긴 과정이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태조의 즉위와 한양 천도가 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새 왕조를 현실의 국가로 완성해 간 연속된 작업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료 읽기에서 주의할 점

『태조실록』은 조선 건국 뒤 편찬되었으므로, 건국 세력의 정당화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공양왕의 “혼암”과 “인심 이탈” 등은 폐위를 추진한 신료들의 주장으로 표기하는 것이 안전하다.

태조의 즉위는 1392년 7월 17일이며, 국호 ‘조선’의 확정은 1393년 2월 15일이다.

한양 천도 명령은 1392년에 처음 내려졌지만 실제 천도는 1394년 10월 25일이다.

1392년 즉위 당시의 수창궁은 개경에 있었으며, 경복궁에서 즉위한 것이 아니다.

조선 왕실의 뿌리를 찾아서 | 출판 원고

 

주요 사료와 참고 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1, 태조 1년 7월 17일·7월 28일·8월 13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15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5~6, 태조 3년 도읍 선정 및 한양 천도 관련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7~8, 태조 3년 12월 3일 및 태조 4년 궁궐·종묘·사직 조성 관련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권45, 세가45 공양왕대 기사.

한영우, 『정도전 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의 건국과 사회 변화』 관련 연구.

 

 

 

 

 

6. 조선 왕실의 조상과 나라의 정통성을 기리는 국가 제례

 

(1) 종묘대제(宗廟大祭)

 

가. 종묘는 어떤 곳인가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리던 왕실 사당이다.

조선은 1394년 한양 천도를 결정한 뒤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단을 건설하였다. 종묘는 1395년(태조 4)에 완성되었으며, 태조의 4대 선조인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신주를 모신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는 단순히 왕실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유교적 국가질서에 따라 궁궐을 중심으로 조상에게 제사하는 종묘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하는 사직을 함께 설치하였다.

따라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말에는 곧 왕조와 국가 자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늘날 종묘의 핵심 제향 공간은 크게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뉜다. 여기에 왕을 보좌한 신하를 모시는 공신당(功臣堂), 왕실과 국가의 일상생활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 등이 함께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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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종묘대제 — 왕이 직접 올리던 가장 큰 제사

종묘대제(宗廟大祭)는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에게 올리는 국가 제례이다.

『국조오례의』의 오례 가운데 길례(吉禮)에 속하며,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직접 행하는 가장 격식 높은 국가 제사였다. 왕뿐 아니라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 등 많은 제관이 참여하였다.

조선시대 정전에서는 원칙적으로 사계절의 첫 달에 정해진 날과 납일을 합하여 연 5회 제향하였고,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향하였다.

오늘날에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종묘대제가 봉행된다. 2026년에도 영녕전 제향에 이어 정전 제향이 봉행되었다.

종묘대제의 특별한 점은 제사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예(禮)·악(樂)·가(歌)·무(舞)가 하나의 의식 속에서 결합한다.

제관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제례를 행하는 동안 악사들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고, 악장(樂章)을 노래하며, 일무(佾舞)를 춘다. 따라서 종묘대제는 조선 왕실의 제례뿐 아니라 음악과 노래, 춤이 함께 보존된 매우 귀중한 종합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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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정전(正殿) — 종묘의 중심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정전(正殿)이다.

오늘날 흔히 '종묘'라고 하면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포함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본래 정전을 종묘라고 부르고 영녕전은 별묘로 구별하였다.

정전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긴 건물이 아니었다.

1395년 창건 당시에는 7칸 규모였으나 왕조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모셔야 할 신주가 늘어나자 계속 동쪽으로 증축되었다.

1546년 11칸, 1726년 15칸으로 늘어났고, 1836년(헌종 2) 다시 4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19신실 규모가 되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정전 제1실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모셔져 있으며 이후 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과 왕비들의 신주가 각 신실에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세실(世室)과 불천위(不遷位)의 개념이다.

원래 일정한 세대가 지나면 선왕의 신주를 정전에서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국가에 특별한 공덕이 있다고 인정된 왕은 신주를 옮기지 않고 정전에 계속 모셨다.

따라서 정전은 단순히 왕의 사망 순서대로 신주를 모아놓은 공간이 아니다. 조선 왕조가 어떤 왕의 업적과 정통성을 특별히 기억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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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영녕전(永寧殿) — 왕실 조상이 길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사당

왕조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왕과 왕비가 계속 세상을 떠나면 정전의 신실만으로는 모든 신주를 모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1421년(세종 3) 정전 서쪽에 새로운 별묘를 세웠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이다.

'영녕(永寧)'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길이 편안하다', 즉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에는 처음 태조의 선대인 목조를 옮겨 모셨고 이후 익조·도조·환조 등도 옮겨 모셨다. 이후 왕조가 계속되면서 정전에서 조천(祧遷)된 왕과 왕비 등의 신주를 봉안하는 공간이 되었다.

영녕전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증축되어 현재 16신실 규모가 되었다.

현재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따라서 정전과 영녕전의 관계는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정전이 왕조의 중심적인 왕통과 공덕을 드러내는 공간이라면, 영녕전은 왕실의 계보와 선대의 신주를 함께 보존함으로써 왕조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두 건물은 서로 우열을 가리는 공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종묘 제도를 완성하는 두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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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공신당(功臣堂) — 왕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지킨 신하들

정전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이 자리한다.

공신당은 정전에 모셔진 역대 왕을 보좌하여 국가에 큰 공을 세운 배향공신(配享功臣)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왕만으로 나라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공로를 다한 신하들이 함께해야 한다는 유교적 국가관이 공간으로 표현된 것이다.

공신당은 처음에는 5칸 규모였으나 정전에 봉안되는 왕과 배향공신이 늘어나면서 계속 확장되어 현재는 긴 건물이 되었다. 현재 83위의 배향공신이 모셔져 있다.

대표적으로 세종 묘정에는 황희·최윤덕, 성종 묘정에는 신숙주·정창손, 선조 묘정에는 이황·이이, 숙종 묘정에는 남구만·최석정, 정조 묘정에는 김종수·김조순 등이 배향되어 있다.

공신당은 조선의 국가관을 잘 보여준다.

정전에 왕이 있다면 공신당에는 그 왕과 함께 나라를 경영한 신하가 있다.

왕과 신하가 함께 국가를 운영한다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죽은 뒤의 종묘 공간에서도 이어가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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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칠사당(七祀堂) — 왕실과 백성의 생활을 돌보는 일곱 신

정전 남쪽 서편에는 작은 건물인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칠사당에는 왕실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일곱 신, 즉 칠사(七祀)를 모셨다.

칠사는 다음과 같다.

신명

독음

의미

司命

사명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관장

司戶

사호

집과 출입을 관장

司竈

사조

부엌과 음식을 관장

中霤

중류

집의 중앙과 거처를 관장

國門

국문

나라의 문을 관장

公厲

공려

재앙·질병 등과 관계된 신

國行

국행

길과 이동을 관장

 

칠사 제사는 국가 제례의 등급 가운데 소사(小祀)에 속하였다.

대부분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보다는 종묘의 사시제와 함께 계절에 해당하는 신에게 제향하였다. 납제에는 일곱 신 모두를 제향하였으며 중류는 별도의 토왕일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칠사당은 매우 흥미로운 공간이다.

왕실의 조상만을 모시는 종묘 안에 인간의 집과 부엌, 문, 길, 생명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이 함께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국가 제례가 왕실 조상에 대한 제사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왕실과 국가, 백성의 일상생활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제례까지 포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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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신당

조선의 종묘 안에 모셔진 고려의 왕과 왕비

종묘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 가운데 하나가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이다.

정식 명칭은

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

독음: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

뜻: 고려 공민왕의 영정을 받들어 모신 사당

이다.

이곳에는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恭愍王)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함께 그려진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영정에서 두 인물은 서로 마주보듯 중앙을 향해 앉아 있으며, 공민왕으로 전해지는 남성은 붉은 옷에 복두를 쓰고 홀을 들고 있다. 노국대장공주로 전해지는 여성은 화려한 관을 쓰고 있다.

신당에는 이 영정과 함께 준마도(駿馬圖) 세 폭도 전해졌다. 이 그림들은 전통적으로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출판 원고에서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안전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자료 역시 이 작품들을 공민왕 신당에 있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왜 조선 왕실의 종묘 안에 고려 왕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모셔져 있을까?

공민왕 신당은 종묘 창건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정확한 창건 경위에 대해서는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 후대에는 종묘를 건설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날아와 떨어져 이를 모시기 위해 신당을 지었다는 전승도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 확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로 구분해야 한다.

현대 연구에서도 공민왕 신당은 종묘 정전·영녕전의 공식 왕실 신주 제향과는 성격이 다른 공간으로 검토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종묘일지』 등의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신당에서 매년 두 차례 치성이 있었으며 별도의 고사도 행해졌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공민왕 신당을 설명할 때는

"태조가 고려 공민왕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웠다"라고 단정하기보다, 종묘 창건 무렵부터 공민왕을 모신 신당이 존재했다고 전하며 그 정확한 창건 배경에는 아직 검토할 부분이 있다

고 서술하는 것이 사료에 가장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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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왕으로 1351년 즉위하여 1374년까지 재위하였다.

그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 황족 출신으로 공민왕과 혼인하여 고려에 왔다. 공민왕이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왕을 지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 출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은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고 이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다.

종묘 공민왕 신당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공민왕 혼자만의 영정이 아니라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그려진 영정이 전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신당은 조선 종묘 안에 남아 있는 고려 왕실의 매우 독특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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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종묘의 공간을 한눈에 이해하기

종묘의 여러 공간은 각각 따로 떨어진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제례 체계를 이룬다.

정전(正殿)은 왕조의 중심이 되는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시는 공간이고, 영녕전(永寧殿)은 조천된 왕과 왕비 및 태조의 선대 등 왕실 계보를 이어가는 공간이다.

공신당(功臣堂)은 왕을 도와 나라를 세우고 다스린 신하를 기억하는 공간이며, 칠사당(七祀堂)은 왕실과 국가의 일상생활과 평안을 관장하는 일곱 신에게 제사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공민왕 신당은 조선 왕실의 공식 신주를 모신 정전·영녕전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별도의 신앙 공간으로, 고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셨다는 점에서 종묘 안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전 — 왕조의 정통성
↓
영녕전 — 왕실 계보의 지속
↓
공신당 — 왕을 보좌한 신하의 공로
↓
칠사당 — 왕실과 국가의 일상과 평안
↓
공민왕 신당 — 종묘 안에 남은 고려 왕실의 특별한 흔적

결국 종묘는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왕릉이고,

종묘는 그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국가 사당이다.

종묘대제는 이 공간에서 선왕을 추모하고 왕조의 정통성을 확인하며, 왕과 신하가 함께 나라의 평안과 지속을 기원했던 조선 최고의 국가 제례였다.

오늘날에도 종묘의 건축과 제례, 음악과 춤이 함께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사와 유교적 국가관을 가장 온전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역시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요 참고자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 종묘 제향 관련 의주 / 궁능유적본부 종묘 자료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국가제례』 / 국가유산진흥원 종묘대제 자료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공민왕·노국대장공주 초상 및 준마도 자료 / 이욱, 「종묘의 공민왕 신당과 수복 연구」, 『종교문화비평』 40, 2021.

 

 

 

【별첨】 종묘대제의 실제 제향 순서

 

신을 맞이하고 술과 음식을 올린 뒤 다시 보내드리는 국가 제례

 

종묘대제(宗廟大祭)는

단순히 제물을 차리고 절을 올리는 의식이 아니다. 조선의 국가 제례는 조상의 신을 맞이하고 [迎神], 폐백과 음식을 올리고, 세 차례 술잔을 올린 뒤 [三獻], 제사를 마치고 신을 보내드리는 [送神] 과정​으로 엄격하게 구성되어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한 국가 전례서에는 제관의 위치와 이동, 절하는 횟수, 음악과 일무, 술과 제물을 올리는 절차까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전체 흐름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쉽다.

영신(迎神) → 전폐(奠幣) → 진찬(進饌) → 초헌(初獻) → 아헌(亞獻) → 종헌(終獻) → 음복(飮福) → 철변두(徹籩豆) → 송신(送神) → 망료(望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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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신(迎神) — 조상의 신을 맞이하다

 

迎神

迎(영): 맞이하다

神(신): 신령

뜻: 신을 맞이하는 절차

종묘대제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제관들이 정해진 위치에 서고 제례를 시작할 준비를 갖춘 뒤,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과 왕비의 신령을 제향의 자리로 정중하게 맞이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향기가 위로 올라가 신령을 맞이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영신례에서는 음악이 연주되고 일무가 행해진다. 종묘대제에서 음악과 춤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신을 맞이하고 공덕을 기리는 제례 자체의 일부 이다.

핵심 의미

“조상의 신령을 종묘 제향의 자리로 정중하게 모셔오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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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폐(奠幣) — 폐백을 올리다

 

奠幣

奠(전): 올리다

幣(폐): 폐백

뜻: 신에게 폐백을 올리는 절차

신을 맞이한 다음에는 폐백을 올린다.

종묘제례에서 폐백은 왕이 조상에게 드리는 정중한 예물이다. 폐백을 올리는 행위는 신령에게 존경과 정성을 표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전폐례에서는 폐백을 올리는 절차와 함께 음악과 일무가 이어진다.

핵심 의미

“맞이한 조상에게 정성을 담은 예물을 올리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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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찬(進饌) — 제사 음식을 올리다

 

進饌

進(진): 올리다

饌(찬): 음식

뜻: 제사 음식을 신위 앞에 올리는 절차

전폐가 끝나면 준비한 제사 음식을 올린다.

종묘의 제수는 단순한 음식상이 아니다. 어떤 음식을 어떤 제기에 담아 어디에 놓을 것인지까지 국가의 전례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제관들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각 신위 앞에 제수를 올린다.

이는 조상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는 효(孝)의 정신을 국가 제례로 표현한 것이다.

핵심 의미

“조상에게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올리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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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헌례(三獻禮)

 

세 차례 술잔을 올리다

종묘대제의 중심은 초헌·아헌·종헌 이다.

이를 합하여 삼헌례(三獻禮)​라고 한다.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이 초헌, 두 번째가 아헌, 마지막 세 번째가 종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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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초헌(初獻) — 첫 번째 술잔을 올리다

 

初獻

初(초): 처음

獻(헌): 올리다

뜻: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

초헌관(初獻官)이 신위 앞에 첫 번째 술잔을 올린다.

조선시대 친행(親行) 종묘제례에서는 국왕이 초헌관이 되어 직접 첫 술잔을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초헌례에서는 술잔을 올린 뒤 축문(祝文)​을 읽는다.

축문에는 제향을 올리는 사람과 제향의 대상, 조상을 추모하고 공덕을 기리는 뜻 등이 담긴다.

따라서 초헌은 삼헌 가운데 특히 중요한 절차이다.

핵심 의미

“첫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어 제향의 뜻을 조상에게 고하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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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헌(亞獻) — 두 번째 술잔을 올리다

 

亞獻

亞(아): 다음, 두 번째

獻(헌): 올리다

뜻: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

초헌에 이어 아헌관(亞獻官)이 두 번째 술잔을 올린다.

아헌은 초헌의 정성을 이어 두 번째로 술을 올리는 의식이다.

종묘제례악과 일무도 삼헌의 진행에 맞추어 달라지며, 제례의 장엄함을 더한다.

핵심 의미

“초헌에 이어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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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헌(終獻) — 마지막 술잔을 올리다

 

終獻

終(종): 마치다

獻(헌): 올리다

뜻: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절차

종헌관(終獻官)이 세 번째 술잔을 올린다.

이로써 초헌·아헌·종헌의 삼헌례(三獻禮)​가 완성된다.

세 차례 술을 올리는 것은 조상에 대한 최고의 정성과 공경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핵심 의미

“마지막 술잔을 올려 삼헌례를 완성하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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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음복(飮福) — 조상이 내려준 복을 받다

 

飮福

飮(음): 마시다

福(복): 복

뜻: 복을 받아 마신다는 의미

삼헌례가 끝난 뒤에는 제사에 올렸던 술과 제물을 나누어 받는 절차가 이어진다.

이를 일반적으로 음복(飮福)​이라 한다.

종묘제례에서는 초헌관이 신이 내려준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술과 제물을 받는 음복수조(飮福受胙)​의 절차가 행해진다.

여기에서 '조(胙)'는 제사에 올린 고기 등 제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음복은 단순히 제사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다.

조상에게 올렸던 제물을 다시 받아 조상이 내려주는 복을 받는다는 상징적 의미 를 가진다.

 

핵심 의미

“조상에게 올린 술과 제물을 받아 조상이 내려주는 복을 받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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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철변두(徹籩豆) — 제기를 거두다

 

徹籩豆

徹(철): 거두다

籩(변): 대나무로 만든 제기

豆(두): 굽이 높은 제기

뜻: 제사에 올린 제물과 제기를 거두는 절차

제향이 거의 끝나면 신위 앞에 올렸던 제물을 거두는 절차가 진행된다.

다만 제례에서는 제물을 일상적인 방식으로 치우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예법에 따라 처리한다.

'변(籩)'과 '두(豆)'는 제사 음식을 담는 대표적인 제기이므로, 철변두는 제물을 거두어 제향을 마무리하는 절차 를 의미한다.

핵심 의미

“조상에게 올린 제물을 거두며 제향을 마무리하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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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송신(送神) — 조상의 신을 보내드리다

 

送神

送(송): 보내다

神(신): 신령

뜻: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

제향을 위해 맞이했던 조상의 신령을 다시 정중하게 보내드리는 의식이다.

제례의 처음이 영신(迎神)​이라면 마지막은 송신(送神)​이다.

따라서 종묘대제의 기본 구조는

迎神 — 신을 맞이하고
祭享 — 정성껏 제향하고
送神 — 신을 보내드리는 것

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핵심 의미

“제향을 마치고 조상의 신령을 정중하게 보내드리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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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망료(望燎) —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것을 지켜보다

 

望燎

望(망): 바라보다

燎(료): 불사르다

뜻: 불사르는 것을 바라본다는 의미

송신이 끝나면 제례에서 사용한 축문과 폐백 등을 정해진 장소에서 불사른다.

초헌관은 이를 지켜보는데, 이 절차를 망료(望燎)​라고 한다.

불길과 연기를 통해 제향에서 사용한 축문과 폐백을 신에게 돌려보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망료까지 마치면 종묘대제의 중요한 제향 절차가 끝난다.

핵심 의미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보며 제향을 마치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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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 제향 절차 한눈에 보기

순서

의식

독음

의미

①

迎神

영신

조상의 신을 맞이함

②

奠幣

전폐

폐백을 올림

③

進饌

진찬

제사 음식을 올림

④

初獻

초헌

첫 번째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음

⑤

亞獻

아헌

두 번째 술잔을 올림

⑥

終獻

종헌

세 번째 술잔을 올림

⑦

飮福

음복

제사 술과 제물을 받아 복을 받음

⑧

徹籩豆

철변두

제물과 제기를 거둠

⑨

送神

송신

조상의 신을 보내드림

⑩

望燎

망료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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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의 핵심 구조

종묘대제의 복잡한 절차를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다음 다섯 단계 로 나누어 보면 된다.

첫째, 신을 맞이한다.

迎神
영신

↓

둘째, 예물과 음식을 올린다.

奠幣 → 進饌
전폐 → 진찬

↓

셋째, 세 차례 술잔을 올린다.

初獻 → 亞獻 → 終獻
초헌 → 아헌 → 종헌

↓

넷째, 조상이 내리는 복을 받고 제물을 거둔다.

飮福 → 徹籩豆
음복 → 철변두

↓

다섯째, 신을 보내고 제례를 마친다.

送神 → 望燎
송신 → 망료

 

즉 종묘대제는

“조상의 신을 맞이하여 → 예물과 음식을 올리고 → 세 차례 술잔을 바치며 →

조상이 내리는 복을 받은 다음 → 다시 신을 정중하게 보내드리는 의식”

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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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에서 음악과 춤의 의미

 

종묘대제에서는 제례의 진행과 함께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연주되고 일무(佾舞)​가 행해진다.

특히 음악과 춤은 선왕의 업적을 크게 두 측면으로 기린다.

보태평(保太平)​은 선왕들의 문덕(文德)을 기리는 음악이며, 이에 맞추어 문무(文舞)​를 춘다.

정대업(定大業)​은 선왕들의 무공(武功)을 기리는 음악이며, 이에 맞추어 무무(武舞)​를 춘다.

따라서 종묘대제는 제사만을 행하는 의식이 아니다.

제례(禮) + 음악(樂) + 노래(歌) + 춤(舞)​이 하나로 결합된 조선 왕실 최고의 종합 국가의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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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종묘대제의 모든 절차에는 조상을 공경하는 효(孝)​와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영신에서 망료에 이르기까지 제관의 위치와 움직임, 제물과 술잔을 올리는 순서, 음악과 노래, 일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국가의 예법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종묘대제는 단순한 왕실의 제사가 아니라 조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예치(禮治)의 정신을 가장 장엄하게 표현한 국가 제례​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사료 및 참고자료

『國朝五禮儀』 吉禮 — 宗廟 관련 의주

『春官通考』 吉禮 — 宗廟 제향

『宗廟儀軌』 — 종묘 제례와 의식

『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 — 종묘 친제의 절차와 배치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종묘 자료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국가제례』

국가유산진흥원 종묘대제·종묘제례악 자료

 

 

 

(2) 사직단(社稷壇)

 

가. 사직단이란?

사직단은 조선 왕조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국가 제사를 올리던 제단입니다.

사(社): 토지의 신

직(稷): 곡식의 신

단(壇):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흙을 쌓아 만든 제단

따라서 ‘사직’은 단순한 제단 이름을 넘어 나라의 영토와 농업, 백성의 삶, 나아가 국가 그 자체를 상징했습니다. “종묘사직을 지킨다”는 말도 왕실의 혈통과 국가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나. 건립과 위치

태조 이성계는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함께 조성했습니다.

이는 옛 도성 건설 원칙인 좌조우사(左祖右社)에 따른 것입니다.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왼쪽인 동쪽에는 종묘

오른쪽인 서쪽에는 사직단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 사당이라면, 사직단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국가 제례 공간이었습니다. 국가유산포털-서울 사직단

 

다. 사단과 직단의 배치

사직단의 중심에는 두 개의 네모난 제단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기준

왼쪽

오른쪽

북신문에서 제단을 바라볼 때

사단(社壇)

직단(稷壇)

방위

동쪽

서쪽

제사의 대상

토지의 신

곡식의 신

중요한 점은 사단과 직단 위에는 건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트인 야외의 방형 제단이며, 제례 준비와 제기 보관 등을 위한 전사청·안향청 같은 부속 건물은 제단 주변에 따로 마련되었습니다.

 

라. 사직대제

조선시대에는 사직단에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사직대제(社稷大祭)를 봉행했습니다.

봄에는 농사의 시작과 풍년을 기원

가을에는 수확에 감사

가뭄·홍수·전염병·전쟁 등 국가적 재난 때에는 특별 제사 봉행

왕이 직접 제사를 올리거나 고위 관리를 보내 대신 봉행

제사에는 희생과 곡식·술 등의 제물을 올리고, 국가의 평안과 백성의 풍요를 기원하는 축문을 읽었습니다.

 

마. 역사적 변화

사직단은 조선 왕조 동안 종묘와 함께 가장 중요한 국가 제례 시설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주변 영역이 공원과 도로로 바뀌면서 여러 부속 건물과 담장이 훼손되고 본래의 공간도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제단과 담장, 부속 시설에 대한 조사와 복원이 이어졌으며, 현재의 서울 사직단은 국가유산 사적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사직단 대문 역시 별도의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국가유산포털-사직단 대문

 

핵심 정리

종묘가 왕실의 혈통과 조상을 상징한다면, 사직단은 나라의 영토와 농업, 백성의 삶을 상징한다.

즉, 사직단은 단순히 풍년을 비는 장소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와 통치의 정당성을 신에게 고하는 조선 최고의 국가 제례 공간이었습니다.

 

 

바. 사직대제 —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제향

 

① 사직, 나라의 근본을 상징하다

사직대제(社稷大祭)는 나라의 토지와 곡식을 관장하는 신에게 국토의 평안과 풍년,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며 올린 국가 제향이다.

‘사(社)’는 토지의 신을 뜻하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뜻한다. 농업을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았던 전통사회에서 토지와 곡식은 백성의 생명과 나라의 존립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따라서 ‘사직’은 단순히 두 신이나 제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점차 나라와 국가 자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종묘사직을 보전한다”는 표현에서 종묘는 왕실의 계통과 정통성을, 사직은 국토와 농업·백성의 생업을 상징한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 왕조의 국가 질서를 떠받치는 두 축이었다.

 

② 한양 천도와 사직단의 조성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궁궐·종묘와 함께 사직단을 조성하였다. 새 왕조의 도읍에는 왕이 정사를 보는 궁궐뿐 아니라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나라의 토지와 곡식에 제사하는 사직단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양의 종묘와 사직단은 고대 도성 건설의 원칙인 다음의 ‘좌조우사(左祖右社)’에 따라 배치되었다.

左祖右社
좌조우사
왼쪽에는 조상을 모시는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을 둔다.

여기에서 왼쪽과 오른쪽은 임금이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한 ③ 경복궁을 중심으로 임금의 왼쪽인 동쪽에는 종묘가, 오른쪽인 서쪽에는 사직단이 자리하였다.

사직단의 중심에는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이라는 두 개의 네모난 제단이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다. 북신문에서 제단을 바라보면 왼쪽인 동쪽에 사단이 있고, 오른쪽인 서쪽에 직단이 있다.

사단과 직단은 하늘이 열린 야외 제단이다. 두 제단 위에는 신을 모시는 별도의 전각이 없다. 다만 제례를 준비하고 향과 축문을 보관하며 제기와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안향청·전사청 등의 부속 건물이 제단 주변에 배치되었다.

 

사. 사직단에 모신 네 신위

사직단에는 토지와 곡식을 대표하는 두 주신(主神)과, 토지 관리와 농경 발전에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두 배향신(配享神)을 함께 모셨다.

제단

주신

배향신

상징

사단(社壇)

태사지신(太社之神)

후토씨지신(后土氏之神)

국토와 토지

직단(稷壇)

태직지신(太稷之神)

후직씨지신(后稷氏之神)

곡식과 농업

태사지신과 태직지신은 토지와 곡식 자체를 신격화한 신이다. 후토씨지신과 후직씨지신은 토지를 다스리고 농사를 보급한 공덕으로 주신과 함께 제향된 배향신이다.

태사지신(太社之神) — 나라의 토지를 관장하는 주신

원문: 太社之神

독음: 태사지신

뜻: 나라의 토지와 그 생산력을 관장하는 사단의 주신

태사지신은 특정한 역사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백성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국토와 그 땅이 지닌 생산력을 신격화한 존재이다.

대한제국의 국가 전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태사지신에게 올리는 축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敢昭告于太社之神
감소고우태사지신
감히 태사지신께 밝게 고합니다.

이어지는 축문에서는 태사지신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德鉅載物 功崇粒民
덕거재물 공숭립민
큰 덕으로 만물을 싣고, 높은 공으로 백성에게 곡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재물(載物)’은 땅이 만물을 싣고 기른다는 뜻이며, ‘립민(粒民)’은 백성에게 곡식을 먹여 살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태사지신은 국토의 안정과 백성의 생업을 지켜 주는 중심 신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대사지신(大社之神), 다른 국가 전례에서는 국사지신(國社之神)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기 『대한예전』에서는 황제국의 의례 체계에 맞추어 태사지신(太社之神)으로 표기하였다.

후토구룡씨지신(后土句龍氏之神) — 토지를 다스린 배향신

신위 표기: 后土氏之神

독음: 후토씨지신

축문상 인물: 后土句龍氏

독음: 후토구룡씨

뜻: 토지를 맡아 다스린 공덕으로 배향된 구룡씨의 신

후토(后土)는 본래 토지를 관장하는 직책 또는 토지의 신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사직 제례에서는 고대에 후토의 직책을 맡아 토지를 잘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구룡씨(句龍氏)를 배향하였다.

신위판에는 일반적으로 ‘후토씨지신(后土氏之神)’이라고 쓰지만, 『대한예전』의 축문에서는 배향 대상이 후토의 직책을 맡았던 구룡씨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以后土句龍氏配神作主
이후토구룡씨배신작주
후토 구룡씨를 배향신으로 삼아 함께 모십니다.

후토씨지신에게 올리는 축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인다.

職專司土 載育萬物
직전사토 재육만물
맡은 직분으로 오로지 토지를 다스리고, 만물을 싣고 길렀습니다.

따라서 태사지신과 후토씨지신은 같은 신이 아니다. 태사지신은 나라의 토지 자체를 신격화한 주신이고, 후토구룡씨지신은 토지를 다스린 공덕으로 태사지신과 함께 모신 배향신이다.

태직지신(太稷之神) — 나라의 곡식과 농사를 관장하는 주신

원문: 太稷之神

독음: 태직지신

뜻: 나라의 곡식과 농업 생산을 관장하는 직단의 주신

태직지신 역시 특정한 역사 인물이 아니다. 백성의 생명을 유지하는 곡식과 농업의 생산력을 신격화한 존재이다.

『대한예전』의 태직지신 축문은 먹을거리와 곡식이 백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食爲民天 百穀用成
식위민천 백곡용성
먹는 것은 백성에게 하늘과 같으며, 온갖 곡식이 이로써 익습니다.

‘식위민천(食爲民天)’은 먹을거리가 백성에게 하늘처럼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려면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어야 했다. 태직지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곧 풍년과 민생 안정을 기원하는 국가적 행위였다.

조선시대에는 대직지신(大稷之神) 또는 국직지신(國稷之神)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태직지신(太稷之神)으로 표기하였다.

후직씨지신(后稷氏之神) — 농사를 보급한 배향신

원문: 后稷氏之神

독음: 후직씨지신

약칭: 후직지신

뜻: 백성에게 농사와 곡식 재배를 가르친 공덕으로 배향된 신

후직(后稷)은 고대에 농사를 맡아 백성에게 곡식 재배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름은 기(棄)라고 전하며, 좋은 곡식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고 농경을 장려한 공덕으로 곡식의 신으로 제향되었다.

『대한예전』은 후직씨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誕播嘉穀 群黎徧毓
탄파가곡 군려편육
좋은 곡식을 널리 퍼뜨려 모든 백성을 두루 길렀습니다.

‘가곡(嘉穀)’은 좋은 곡식을 뜻하고, ‘군려(群黎)’는 수많은 백성, 곧 온 백성을 뜻한다. ‘편육(徧毓)’은 빠짐없이 두루 길러 주었다는 의미이다.

태직지신이 곡식과 농업 자체를 상징하는 주신이라면, 후직씨지신은 농사를 보급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 공덕으로 함께 모신 배향신이다.

 

아. 네 신위의 배치

『세종실록』 「오례」의 「친제사직의(親祭社稷儀)」와 「제사직섭사의(祭社稷攝事儀)」에는 사직단의 신좌를 설치하는 위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設大社神座於壇上南方近東北向
설대사신좌어단상남방근동북향
대사의 신좌를 단상 남쪽에서 동쪽 가까이에 북향으로 설치한다.

后土氏神座於大社神座之左東向
후토씨신좌어대사신좌지좌동향
후토씨의 신좌는 대사 신좌의 왼쪽에 동향으로 설치한다.

設大稷神座於壇上南方近西北向
설대직신좌어단상남방근서북향
대직의 신좌를 단상 남쪽에서 서쪽 가까이에 북향으로 설치한다.

后稷氏神座於大稷神座之左東向
후직씨신좌어대직신좌지좌동향
후직씨의 신좌는 대직 신좌의 왼쪽에 동향으로 설치한다.

이를 쉽게 정리하면, 동쪽의 사단에는 토지의 주신인 대사지신과 배향신인 후토씨지신을 모시고, 서쪽의 직단에는 곡식의 주신인 대직지신과 배향신인 후직씨지신을 모신 것이다.

주신인 대사와 대직의 신좌는 북쪽을 향하게 하고, 배향신인 후토씨와 후직씨의 신좌는 주신을 향해 동쪽을 바라보도록 배치하였다. 신좌 아래에는 왕골로 만든 자리인 완석(莞席)을 깔았다. 이러한 배치는 주신과 배향신의 위계와 관계를 공간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세종실록』 「오례」 사직 진설

 

자. 사직대제를 지내는 시기

『세종실록』 「오례」의 「친제사직의」에는 사직대제를 지내는 날짜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春秋二仲上戊及臘日
춘추이중 상무 급 납일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첫 무일과 납일에 제사를 지낸다.

‘춘추이중(春秋二仲)’은 봄과 가을의 가운데 달, 곧 음력 2월과 8월을 뜻한다. ‘상무일(上戊日)’은 그달의 첫 번째 무일(戊日)이며, ‘납일(臘日)’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여러 신에게 감사를 올리던 날이다.

서운관은 미리 제향 날짜를 정해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는 임금에게 아뢴 뒤 관계 관청에 알려 제례를 준비하게 하였다. 사직대제는 개인이나 마을에서 자율적으로 지내는 제사가 아니라 국가가 날짜와 절차, 제관과 제물을 엄격하게 정하여 봉행한 국가 의례였다. 『세종실록』 「오례」 친제사직의 시일

 

차. 재계와 제향 준비

사직대제를 앞두고 임금과 제관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재계(齋戒)를 행하였다. 제사를 준비하는 관리들은 제단의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신좌와 제기, 제물, 향과 축문을 정해진 위치에 마련하였다.

제사 전날에는 등가악(登歌樂)과 헌가(軒架)를 연주할 악대를 배치하였다. 등가는 제단 위쪽에서 연주하는 음악이고, 헌가는 제단 아래쪽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다. 사직대제는 제물과 절차만 갖춘 제사가 아니라 음악·노래·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적인 국가 의례였다.

제물은 신위별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진설하였다. 곡식과 과실, 포와 젓갈, 술과 희생 등을 여러 제기에 나누어 담았다. 제기의 종류와 위치, 제물의 수량과 담는 순서까지 국가 전례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카. 사직대제의 주요 절차

사직대제는 신을 맞이하고 제물을 올린 뒤 신을 보내 드리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를 행하고, 향과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를 거행하였다. 이어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례,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가 차례로 이어졌다.

초헌례에서는 초헌관이 첫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었다. 축문에는 제향을 올리는 뜻과 나라의 평안, 풍년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겼다.

세 차례의 헌작이 끝나면 제사에 올렸던 술과 제물을 나누어 받는 음복례를 행하였다. 음복은 신이 내려 준 복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에는 축문과 폐백을 땅에 묻는 망예례를 거행하였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제사였으므로 축문과 폐백을 불태우는 대신 땅에 묻어 제사를 마쳤다.

 

타. 나라의 재난을 고한 기고제

사직에서는 봄과 가을의 정기 제향뿐 아니라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 특별 제사를 올렸다. 이를 기고사직(祈告社稷)이라 한다.

『세종실록』 「오례」의 「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에는 특별 제사의 축문을 지어야 하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若水旱癘疾蝗蟲戰伐 各臨時撰之
약수한여질황충전벌 각임시찬지
홍수·가뭄·전염병·황충·전쟁의 경우에는 각각 그때에 맞추어 축문을 짓는다.

물이 너무 많아 발생한 홍수, 비가 오지 않는 가뭄,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 농작물을 해치는 황충,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는 사직의 신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도움을 기원하였다.

재난이 해결되거나 기원이 이루어진 뒤에는 신에게 감사하는 보사(報祀)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직단은 정해진 날짜에만 제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와 백성의 고통을 신에게 고하는 공간이었다. 『세종실록』 「오례」 기고사직의

 

파. 국왕의 책임을 확인한 국가 제향

사직대제는 단순히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 제사가 아니었다. 국왕이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국토를 지키고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킬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토지가 평안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곡식이 풍성해야 백성이 굶주리지 않는다. 백성의 삶이 안정되어야 나라 역시 평안하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직대제에는 백성의 생활을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민본적 통치 이념이 담겨 있었다.

태사지신과 태직지신은 국토와 곡식이라는 나라의 물질적 기반을 상징하였다. 후토구룡씨지신과 후직씨지신은 토지를 바르게 다스리고 농사를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통치의 모범을 나타냈다.

네 신위에 대한 제향은 결국 국왕에게 토지를 잘 관리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백성이 굶주리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을 일깨우는 국가 의례였다.

 

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직대제

사직대제는 조선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종묘대제와 함께 가장 중요한 국가 제향으로 봉행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뒤 국가 제례로서의 전승이 끊기고, 일제강점기에는 사직단 일대가 공원과 도로로 바뀌면서 본래의 영역과 여러 부속 시설이 훼손되었다.

광복 이후 사직단과 사직대제의 역사적 가치를 되찾기 위한 조사와 복원, 제례 재현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사직대제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했던 전통 국가 제례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무형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국가유산포털 「사직대제」

 

맺음말

사직대제는 나라의 토지와 곡식에 감사하고 국토의 평안과 풍년,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 조선의 대표적인 국가 제향이었다.

사단에는 나라의 토지를 관장하는 태사지신과 토지를 다스린 공덕으로 배향된 후토구룡씨지신을 모셨다. 직단에는 나라의 곡식과 농업을 관장하는 태직지신과 농사를 널리 보급한 공덕으로 배향된 후직씨지신을 모셨다.

태사지신과 태직지신이 토지와 곡식 자체를 신격화한 주신이라면, 후토구룡씨지신과 후직씨지신은 토지 관리와 농경 발전에 공을 세운 배향신이었다. 이 네 신위의 구성에는 나라가 토지를 바르게 다스리고 농업을 장려하여 백성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국가적 책무가 담겨 있다.

사직단은 단순한 제사 유적이 아니다. 그곳은 국왕이 나라의 재난과 백성의 어려움을 신에게 고하고, 국토와 민생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던 공간이었다. 사직대제에는 “땅이 있어야 나라가 서고, 곡식이 있어야 백성이 살아간다”는 전통사회의 국가관과 민본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요 사료 및 참고 자료

『세종실록』 권129, 「오례」 길례의식, 「친제사직의(親祭社稷儀)」.

『세종실록』 권129, 「오례」 길례의식, 「제사직섭사의(祭社稷攝事儀)」.

『세종실록』 권129, 「오례」 길례의식, 「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 사직 관련 의주.

『대한예전(大韓禮典)』 「사직」, 삼대제축(三大祭祝).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서울 사직단」.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직대제」.

 

(3) 원단제

 

 

 

 

7.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온수현 온행

―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은 온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재위 기간 여러 차례 온천을 찾았다. 그 가운데 1396년(태조 5)의 온행은 왕이 온천을 찾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태조실록』이 직접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태조는 신료들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온행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충청도 온천으로 향하였다. 또한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온천에 머물 숙소를 마련하도록 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기 왕실 온행이 어떻게 준비되고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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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행에 앞서 숙소부터 마련하다

 

1396년 3월 4일, 태조는 온천에 왕이 머물 수 있는 원(院)을 마련하도록 명하였다.

『태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原文

命集僧徒, 營院于溫泉, 仍賜米豆三十碩。

독음

명집승도, 영원우온천, 잉사미두삼십석.

풀이

승려들을 모아 온천에 원(院)을 짓게 하고, 이어 쌀과 콩 30석을 내려 주었다.

―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4일 신유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營院于溫泉”, 즉 ‘온천에 원을 마련하였다’는 기록이다.

원(院)은 당시 여행자나 관리 등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숙박 시설을 뜻한다. 왕이 온천으로 떠나기 불과 6일 전에 온천에 원을 마련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은 태조의 온행을 위한 현지 준비가 이미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태조는 단순히 건물을 마련하라는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쌀과 콩 30석 을 함께 하사하였다. 따라서 이 기록은 온행을 앞두고 숙박과 현지 운영에 필요한 준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원을 후대의 제도화된 ‘온양행궁’과 동일한 건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기록에는 분명히 원(院)​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 초기 온천 행차를 위한 숙박시설 또는 임시 체류시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null)

(2) 신료들은 왜 태조의 온행을 반대했는가

 

온행 준비가 이루어진 지 6일 뒤인 3월 10일, 태조는 충청도의 온천으로 출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출발을 앞두고 조정에서 반대가 제기되었다.

먼저 간관(諫官) 이정견(李廷堅) 등​이 왕에게 온행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태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번에는 대간(臺諫)이 함께 뜻을 모아 다시 온행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태조실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原文

上幸忠淸道溫泉。
初諫官李廷堅等請止之, 不允。
臺諫又合辭請止之.

독음

상행충청도온천.
초간관이정견등청지지, 불윤.
대간우합사청지지.

풀이

임금이 충청도의 온천으로 행차하였다.
처음에 간관 이정견 등이 이를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간이 다시 함께 뜻을 모아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10일 정묘

이 짧은 기록에서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간관 이정견 등 이 반대하였다. 태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번에는 대간이 합사(合辭)​하여 다시 중지를 요청하였다.

즉 한 차례의 단순한 건의가 아니라 신료들의 반대가 거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 상소문 전문’은 전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사료를 다룰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태조실록』 1396년 3월 10일 기사에는 신료들이 온행을 중지하도록 요청했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이 올린 상소문의 전문이나 구체적인 반대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후대 태종·세종 때의 온행 반대 상소에 나타나는 백성의 부담, 농사철의 폐해, 수행 인원의 문제 등을 그대로 가져와 1396년 태조의 온행을 반대한 이유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료가 말해 주는 범위는 명확하다.

간관 이정견 등이 먼저 중지를 요청했고, 태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대간이 다시 합사하여 중지를 요청했다는 사실까지가 『태조실록』에서 직접 확인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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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에 가는 것이다”

 

신료들의 거듭된 반대에 태조는 자신의 온행 목적을 직접 밝혔다.

이 말은 조선 왕실의 온천 이용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原文

上曰:
“欲往溫泉, 爲療疾也。
臺諫力止之, 何義耶?”
遂行。

독음

상왈,
“욕왕온천, 위료질야.
대간역지지, 하의야?”
수행.

풀이

임금이 말하였다.
“온천에 가고자 하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대간이 힘써 이를 말리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침내 행차하였다.

―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10일 정묘

특히 중요한 표현이 바로

“欲往溫泉, 爲療疾也”
― “온천에 가고자 하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라는 태조의 말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396년의 온행은 단순한 유람이나 휴식을 위한 행차가 아니었다. 태조 자신이 ‘요질(療疾)’, 즉 질병의 치료​를 온행의 목적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만 『태조실록』은 이 기사에서 태조가 앓고 있던 구체적인 병명이나 증상까지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특정 질환이나 ‘한사(寒邪)’와 같은 병증으로 단정하는 것은 사료의 범위를 넘어선다. 출판 원고에서는 태조의 표현 그대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온행’​이라고 서술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null)

(4)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온행을 단행하다

 

태조는 간관과 대간의 거듭된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온행이 병 치료를 위한 것임을 밝힌 뒤 결국 출발하였다.

실록의 마지막 두 글자,

“遂行”
― “마침내 행차하였다.”

는 당시 상황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왕의 건강을 위해 온천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태조와 왕의 장거리 행차를 중지시키려는 언관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태조는 치료의 필요성을 더 중요하게 판단하였다.

따라서 1396년 온행은 조선 초기부터 왕의 건강과 치료가 국가 운영의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음 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null)

(5) 3월 10일 출발하여 3월 16일 온천에 도착하다

 

태조는 3월 10일 충청도 온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고 6일 뒤인 3월 16일 온천에 도착하였다.

『태조실록』의 기록은 매우 간결하다.

原文

上至溫泉。

독음

상지온천.

풀이

임금이 온천에 도착하였다.

―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16일 계유

따라서 실록을 기준으로 행정을 정리하면,

3월 10일 출발 → 3월 16일 온천 도착

이라는 일정이 확인된다.

출발에서 도착까지 약 6일이 걸린 셈이다.

이 기록에서 말하는 충청도 온천은 당시 행정구역상 온수현의 온천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아산 온양온천 일대에 해당한다.

 

(null)

(6) 온천에서 약 보름 동안 머물다

 

태조는 3월 16일 온천에 도착한 뒤 곧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태조실록』에는 태조가 4월 1일 온천을 출발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原文

駕發溫泉, 次寧州.

독음

가발온천, 차영주.

풀이

거가가 온천을 출발하여 영주에 머물렀다.

―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4월 1일 무자

영주(寧州)는 오늘날의 천안 지역 이다.

따라서 실록에서 직접 확인되는 온천 체류 일정은

1396년 3월 16일 도착
→ 4월 1일 출발

이다.

날짜의 차이로 계산하면 16일 , 도착일과 출발일을 모두 포함하여 세면 17일간​이다.

따라서 출판 원고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태조는 온천에서 약 보름, 날짜를 포함해 계산하면 17일간 체류하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단순히 온천에 들러 하루 이틀 목욕하고 돌아간 행차가 아니라 일정 기간 머물면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천을 이용한 체류형 온행 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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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온천을 떠나 귀경길에 오르다

 

4월 1일 태조는 온천을 떠나 영주, 즉 오늘날 천안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실록은 이때 왕의 행렬이 지나가면서 말을 풀어놓아 백성들의 보리밭을 해치지 못하도록 순군관을 보내 단속한 사실도 함께 기록하였다.

이는 왕의 행차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농작물에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정이 관리하였음을 보여준다.

태조는 이후 귀경길에 올라 4월 7일 온천에서 돌아왔다.

따라서 전체 행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월 4일
온행 준비 — 온천에 원(院)을 마련하고 쌀·콩 30석 지급

↓

3월 10일
간관 이정견 등이 온행 중지를 요청

↓

태조가 불허

↓

대간이 다시 합사하여 중지를 요청

↓

태조
“欲往溫泉, 爲療疾也”
“온천에 가려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

3월 10일
반대를 물리치고 충청도 온천으로 출발

↓

3월 16일
온천 도착

↓

3월 16일~4월 1일
약 보름간 온천 체류·치료

↓

4월 1일
온천 출발 → 영주(오늘날 천안) 숙박

↓

4월 7일
귀환

 

(null)

태조의 온행이 갖는 역사적 의미

 

1396년 태조 이성계의 온행은 조선 왕실의 온천 이용이 단순한 휴양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무엇보다 『태조실록』에는 태조 자신의 입을 통해 온행 목적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欲往溫泉, 爲療疾也.”
“온천에 가고자 하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이 한 문장은 조선 왕실의 온천 이용사를 이해하는 핵심 사료라 할 수 있다.

왕이 온천으로 출발하기 전에는 온천에 머물 원(院)​을 마련하고 쌀과 콩 30석을 지급하였다. 이는 왕의 온행이 즉흥적인 여행이 아니라 사전에 숙박과 체류 준비가 이루어진 계획된 행차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간관 이정견 등을 비롯한 신료들은 온행을 중지하도록 요청하였다. 태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대간이 다시 합사하여 중지를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태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행차임을 분명히 밝히고 온행을 단행하였다.

3월 10일 출발한 태조는 3월 16일 온천에 도착하여 4월 1일까지 약 보름 동안 머물렀다. 도착일과 출발일을 포함하면 17일에 해당한다. 이후 영주를 거쳐 귀경하여 4월 7일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태조의 1396년 온행은

‘온행 준비 → 신료들의 반대 → 치료 목적 천명 → 온행 단행 → 온천 장기 체류 → 귀환’

이라는 뚜렷한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태조대의 경험이 조선 왕실의 온천 이용 전통 가운데 매우 이른 시기의 사례라는 점이다. 이후 왕실의 온천 행차는 계속 이어졌으며, 특히 세종대에 이르면 온수현의 온천은 왕과 왕실의 치료를 위한 중요한 장소로 다시 등장한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의 1396년 온행은 오늘날 온양온천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조선 왕실의 치료와 온행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가는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 라고 평가할 수 있다.

 

(null)

사료 및 출전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4일 신유
― “命集僧徒, 營院于溫泉, 仍賜米豆三十碩.”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10일 정묘
― 간관 이정견 등의 온행 중지 요청, 대간의 합사 중지 요청
― “欲往溫泉, 爲療疾也。臺諫力止之, 何義耶? 遂行。”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3월 16일 계유
― “上至溫泉。”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4월 1일 무자
― “駕發溫泉, 次寧州.”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4월 7일 갑오
― 온천에서 돌아옴.

 

 

 

8. 조선 왕실의 치유온천, 온양행궁

세종대왕의 온행과 온양

― 병을 다스리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다

 

(1) 세종은 왜 온천을 찾았는가?

 

세종대왕은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크게 정비한 성군이었지만, 재위 중반 이후 여러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오랫동안 많은 정무와 학문 연구를 직접 챙기면서 건강이 점차 나빠졌고, 안질도 심해졌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자신의 눈 상태를 직접 설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1441년(세종 23) 4월 4일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이는 세종의 안질이 단순한 눈의 피로 정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세종에게 온천은 유람지가 아니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계속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찾은 치료와 요양의 장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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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 번째 온행을 준비하다 ― 1432~1433년

 

세종의 첫 온수현 온행은 1433년(세종 15)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온행 준비는 그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온천 행차에 필요한 시설과 호종 인원, 군사 배치, 물자 공급 등을 준비하였다.

특히 세종은 온행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하였다. 왕 한 사람의 치료를 위해 많은 관리와 군사, 말이 움직이면 행차로 주변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온행에 필요한 물품의 수량을 정하도록 하고, 충청도와 경기도에 행차와 관련하여 불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부담시키지 않도록 한 기록들이 보인다.

따라서 세종의 온행 준비에는 두 가지 원칙이 함께 있었다.

하나는 왕의 치료를 위한 철저한 준비 였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백성에게 가능한 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조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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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1차 온행 ― 1433년

1433년 3월 25일 세종은 왕비와 함께 온수현의 온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幸溫水縣溫井

“온수현의 온정에 행차하였다.”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부마와 의정부·육조·대간의 관리 등이 호종하였다.

이는 세종의 온행이 개인적인 여행이 아니라 왕실과 국가기관이 움직이는 공식적인 국왕 행차였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온천에서 상당 기간 머물며 목욕과 요양을 하였다.

그리고 4월 23일 환궁할 때 성균관 학생들이 올린 가요에는 세종이 과도하게 국정에 힘써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신하들이 조섭을 권했고, 온천에 행차한 뒤 몸이 편안해지고 병환이 나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내용 가운데 핵심은 다음과 같다.

聖體過於優勤, 群臣請其調攝。
於是時方和煦, 駕幸溫泉……

쉽게 풀면,

“성상의 몸이 지나치게 근심하고 부지런하심으로 상하였기에 여러 신하가 몸을 조리하시도록 청하였습니다. 이에 날씨가 따뜻해지자 온천에 행차하셨습니다.”

라는 뜻이다.

이어 왕의 몸이 편안해지고 병환이 쾌차하였음을 축하하였다.

따라서 1433년의 첫 온행은 세종의 과로와 건강 악화에 따른 치료 목적의 온행 으로 이해할 수 있다.

 

(null)

(4) 1440년 소헌왕후도 온수현을 찾다

 

세종의 온수현 이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

1440년(세종 22)에는 세종 자신이 아니라 소헌왕후가 온수현의 온천으로 행차하였다.

『세종실록』 3월 2일에는

“중궁이 충청도 온수현의 온천에 거둥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전날에는 왕비의 온천 행차를 종묘에 고하는 절차가 있었고, 행차로 피해를 입는 백성에게 보상하도록 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이는 온수현의 온천이 세종 개인만 이용한 장소가 아니라 왕실의 치료와 요양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음 을 보여준다.

따라서 세종 자신의 온행 횟수와는 별도로 소헌왕후의 1440년 온행도 온양행궁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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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차 온행 ― 1441년, 심해진 안질

 

세종은 1441년 다시 온수현을 찾았다.

이때는 특히 안질 치료 가 중요한 목적이었다.

세종의 눈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팠으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온천에서 목욕을 계속했지만 처음부터 바로 효과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세종 자신도 처음에는

“浴溫泉後, 亦未見效”

라는 취지로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아직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1441년 4월 4일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세종은 도승지 조서강 등에게 자신의 눈 상태를 설명하면서 전날 밤에 의학서인 『본초』를 펼쳐 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남겼다.

昨夜披閱本草細註(작야피열본초세주) 亦可見焉(역가현언).

쉽게 풀면,

“어젯밤 『본초』를 펼쳐 잔 주석까지 보았는데, 또한 볼 만하였다.”

는 뜻이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얼마 전까지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 어려웠던 세종이 이제는 의학서의 작은 주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호전되었음 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물론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온천욕이 세종의 안질을 직접 치료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세종 자신이 온천에 머물던 기간에 시력이 좋아진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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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병이 나았으므로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키다

1441년 4월 17일 세종은 매우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온수현을 온양군(溫陽郡)​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세종실록』의 원문은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上以病愈, 特陞溫水縣爲溫陽郡.

독음은,

상이병유, 특승온수현위온양군.

이다.

뜻은 명확하다.

“임금이 병이 나았으므로 특별히 온수현을 승격하여 온양군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두 가지이다.

病愈 ― 병이 나았다.

그리고

特陞 ― 특별히 승격하였다.

이다.

따라서 온수현이 온양군으로 승격된 이유를 다른 데서 추측할 필요가 없다.

『세종실록』이 그 이유를 직접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 자신의 병이 호전된 것을 계기로 온수현을 특별히 온양군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온양(溫陽)’이라는 지명의 역사적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은 군으로 승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호에 맞도록 관노비도 채워 주도록 하였다. 이는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행정적 위상까지 높인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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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왕의 치료 때문에 백성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세종의 온행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지역 백성에 대한 태도이다.

왕의 대규모 행차에는 많은 수행원과 군사·말·물자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농경지가 훼손되거나 지역 주민들이 물자를 부담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를 경계하였다.

1433년 첫 온행 때에는 온정 부근에서 밭을 갈던 농민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1440년 소헌왕후의 온행 때에도 행차 때문에 피해를 입은 백성을 보상하도록 하였다.

1443년 온행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온정 주변의 농민 남녀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위로하였다.

또 온정 부근의 농민들을 구휼하도록 하고 관리들을 나누어 보내 행차로 인한 폐해를 살피게 하였다.

특히 행차 과정에서 보리밭이 손상되자 그 피해를 조사하여 보상하도록 명하였다.

왕의 치료를 위한 행차였지만 그 때문에 백성의 생업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세종의 생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세종의 온행은 왕실의 치료사인 동시에 조선 초기 애민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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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3차 온행 ― 1443년 다시 온양을 찾다

 

1443년(세종 25) 세종은 다시 왕비와 함께 온천으로 향하였다.

이때 실록의 지명은 이전과 달라져 있다.

1433년에는

“溫水縣 溫井” ― 온수현 온정

이라고 기록하였지만,

1443년에는 이미 1441년에 군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忠淸道 溫陽郡 溫泉” ― 충청도 온양군 온천

으로 기록된다.

즉 세종의 온행 기록 속에서 온수현 → 온양군 이라는 지명의 변화가 그대로 확인되는 것이다.

세종은 온양에서 목욕과 요양을 한 뒤 4월 초 온정을 떠나 귀경하였다.

그리고 환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7일 , 조선의 정치 운영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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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자에게 일부 정무를 맡기다

 

1443년 4월 17일 세종은 직접 교지를 작성하여 세자, 즉 훗날 문종에게 상당 부분의 정무를 맡기겠다고 선언하였다.

세종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予素多疾病, 邇來尤甚.

독음은,

여소다질병, 이래우심.

뜻은

“나는 본래 병이 많았는데 근래에 와서 더욱 심해졌다.”

이다.

세종은 이어 중요한 국가의 결정은 자신이 계속 처리하겠지만 나머지 서무는 세자가 결재하도록 하였다.

若用人刑人用兵, 予親聽斷,
其餘庶務, 皆取世子裁決.

즉,

“사람을 임용하고, 사람을 형벌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일은 내가 직접 판단하되, 그 밖의 여러 정무는 모두 세자에게 결재하도록 하겠다.”

는 것이다.

세종은 그 목적도 분명히 밝혔다.

如此則予得安心養疾,
嗣子亦得明達庶政.

즉,

“이렇게 하면 나는 마음 놓고 병을 조리할 수 있고, 세자 또한 여러 정무에 밝고 익숙해질 수 있다.”

는 것이다.

따라서 사료에 나타난 직접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는 세종 자신의 건강 악화와 치료·요양 ,
둘째는 세자에게 실제 국정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 이었다.

 

(null)

(10) 그렇다면 세종은 왜 정무 부담을 크게 줄이려 했을까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443년 4월 세종은 세자에게 상당한 정무를 맡겼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적 성취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처음으로 실록에 나타난다.

두 사건 사이에는 약 8개월의 간격이 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세자에게 정무를 나누어 맡긴 것이 단순히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훈민정음 연구와 창제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여기에는 사료상의 경계가 필요하다.

사료로 확인되는 사실

『세종실록』은 세자에게 정무를 맡긴 직접적인 이유를 세종의 병세와 세자의 정무 수련 이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세자에게 정무를 맡겼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나 연구해 볼 수 있는 가능성

그렇다고 두 사건의 시간적 관계를 전혀 주목하지 않을 필요도 없다.

훈민정음과 같은 새로운 문자 체계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음운의 분석, 초성·중성·종성의 체계화, 글자 형태와 운용 방법 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구체적인 연구 과정이 『세종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1433·1441·1443년의 온행과 요양 기간 , 그리고 1443년 4월 이후 세자에게 일부 정무를 맡겨 국왕의 업무 부담을 줄인 시기​가 세종에게 학문적 구상과 연구를 위한 시간을 제공했을 가능성은 연구 가설로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황에 기초한 연구적 추론 이지 실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다.

출판물에서는 이 두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null)

(11) 그리고 1443년 12월 ― 훈민정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1443년 12월 『세종실록』에는 마침내 역사적인 기록이 등장한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독음은,

시월, 상친제언문이십팔자.

이다.

뜻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는 것이다.

실록은 새 문자의 구조도 설명하였다.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이를 합하면 글자가 되고, 우리말을 모두 적을 수 있으며 글자는 간단하지만 그 활용은 무궁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언한다.

是謂訓民正音.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上親制 , 즉 “임금이 친히 지었다”​는 표현이다.

『세종실록』은 훈민정음 창제의 주체를 세종으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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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온양에서 훈민정음까지 ―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세종의 온행과 훈민정음 창제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할 수 있는 사료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온양에서 만들었다.”

거나

“세종이 훈민정음을 연구하기 위해 온양에 갔다.”

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종의 생애 흐름을 시간순으로 살펴보면 주목할 만한 연속성이 나타난다.

1433년 제1차 온수현 온행
과로로 손상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온행

↓

1440년 소헌왕후 온행
왕실 치료·요양지로서 온수현 이용

↓

1441년 제2차 온행
심각한 안질 치료

↓

1441년 4월 4일
『본초』의 작은 주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호전됨

↓

1441년 4월 17일
“병이 나았으므로(上以病愈)”
온수현을 온양군 으로 특별 승격

↓

1443년 제3차 온양 온행

↓

1443년 4월 17일
병세가 심해졌다며 세자에게 상당 부분의 서무를 맡김

↓

1443년 12월
세종이 친히 언문 28자를 창제

↓

훈민정음 탄생

이 흐름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은 세종이 오랜 기간 질병과 안질에 시달렸으며, 온천을 치료와 요양의 공간으로 이용했고, 1441년에는 실제로 시력이 호전되었음을 스스로 언급했으며, 그 결과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특별히 승격했다는 것이다.

또 1443년 마지막 온행 직후 세종은 자신의 병세가 심해졌음을 이유로 세자에게 상당 부분의 정무를 맡겼고, 그해 12월에는 세종이 친히 만든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이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였다.

 

(null)

맺음말 ― 세종에게 온양은 무엇이었는가

 

온양은 세종에게 단순히 따뜻한 물이 솟는 고장이 아니었다.

세종은 과도한 국정 수행으로 건강을 해쳤고, 특히 안질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차례 온수현을 찾았다.

1433년 첫 온행에서 치료와 요양의 효과를 경험하였고, 1441년에는 심각했던 시력이 『본초』의 작은 주석을 읽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세종은 이를 매우 특별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세종실록』은

上以病愈, 特陞溫水縣爲溫陽郡

이라고 기록하였다.

“임금이 병이 나았으므로 특별히 온수현을 승격하여 온양군으로 삼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온양’이라는 이름에는 세종의 치료와 회복이라는 역사적 기억이 담겨 있는 셈이다.

세종은 왕의 치료 때문에 백성이 피해를 입는 것도 경계하였다. 행차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고, 피해를 입은 농작물을 조사하여 보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43년 다시 온양을 다녀온 뒤 세종은 병이 더욱 심해졌음을 밝히면서 세자에게 상당 부분의 정무를 맡겼다.

그해 12월, 『세종실록』에는 마침내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온양 온행이 훈민정음 창제를 직접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종의 건강 회복과 안질의 호전, 정무 부담의 조정,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라는 일련의 사건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함께 살펴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연구 과정이 실록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온양에서 확보한 요양의 시간과 1443년 세자에게 일부 정무를 맡긴 조치가 세종에게 학문적 연구와 새로운 문자 구상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을 가능성 은 하나의 연구 과제로 제시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료에 근거한 사실 위에서 제기하는 가능성 이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온양은 세종에게 단순한 온천장이 아니라 병든 몸을 쉬게 하고 다시 국정을 수행할 힘을 얻었던 왕실의 치유 공간 이었다.

 

그리고 그 치유와 휴식의 시간 뒤에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화적 성취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오늘날 온양의 역사를 더욱 의미 있게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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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료

① 『세종실록』 권59, 세종 15년(1433) 3월 25일
― 세종과 왕비의 온수현 온정 행차.

② 『세종실록』 권60, 세종 15년(1433) 4월 23일
― 온행의 배경으로 세종의 과로와 조섭을 언급하고 온천 체류 후 건강 회복을 축하한 기록.

③ 『세종실록』 권88, 세종 22년(1440) 3월 1~2일
― 소헌왕후의 온수현 온천 행차와 백성 피해 보상.

④ 『세종실록』 권92, 세종 23년(1441) 4월 4일
― 세종의 안질 상태와 『본초』의 작은 주석까지 볼 수 있게 된 사실.

⑤ 『세종실록』 권92, 세종 23년(1441) 4월 17일
― “上以病愈, 特陞溫水縣爲溫陽郡.”
병이 나았으므로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특별 승격.

⑥ 『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1443) 3~4월
― 세종과 왕비의 온양군 온천 행차, 농민 위로 및 농작물 피해 보상.

⑦ 『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1443) 4월 17일
― 세종이 병세 악화를 이유로 일부 핵심 국사를 제외한 서무를 세자에게 맡기도록 한 교지.

⑧ 『세종실록』 권102, 세종 25년(1443) 12월
―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
세종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라 이름.

사료 해석상의 주의

확실한 사실: 세종의 반복된 온행, 안질, 1441년 시력 호전, 병이 나은 것을 이유로 한 온양군 승격, 1443년 세자에게 정무 일부 이양, 1443년 12월 훈민정음 창제.

연구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 온행에 따른 휴식과 건강 회복, 그리고 세자에게 정무를 분담시켜 확보한 시간이 훈민정음 연구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

현재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 주장: “세종이 훈민정음을 연구하기 위해 온양에 갔다”, “훈민정음을 온양에서 창제했다”, “세자에게 정무를 맡긴 직접적인 목적이 훈민정음 연구였다”는 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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