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 허목의 「지덕사기(至德祠記)」와 정조의 어제「지덕사기(至德祠記)」원문과 해설

 

미수 허목의 「지덕사기(至德祠記)」

― 양녕대군을 ‘지덕(至德)’의 인물로 재평가하다



1. 「지덕사기」의 출전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덕사기(至德祠記)」는 그의 문집 『기언(記言)』 권45 「외가묘문유사(外家墓文遺事)」​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양녕대군의 생애를 간략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허목은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의 성덕을 알아보고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고대 중국의 태백(泰伯)·우중(虞仲)의 고사와 연결하였다.

또한 허목 자신이 숙종에게 양녕대군의 사당 건립을 건의한 사실과 사당이 완성되어 ‘지덕사(至德祠)’​라 불리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2. 「지덕사기」 원문

至德祠記

讓寧大君。我太宗長子也。初立爲世子。

野史曰。永樂五年。遣世子禔朝京師。帝遇之特厚。引升御座。執手與語。稱之曰賢王子也。厚賜之。

及還。過曲阜。謁孔子廟。

弟忠寧大君生有聖德。百姓歸心。世子心知之。佯狂逃去以讓之。

十六年。三公率文武百官。請廢之。立忠寧大君爲世子。是爲莊憲王。

因放禔於廣州。一時擬之泰伯、虞仲。

好弋獵馳騁飮醉以自狂。無他事矣。

莊憲王卽位。尊禮之甚善。惟所意欲。一以順適爲心。

封讓寧大君。子𧪚爲順原君。

大君以壽考終。

上之元年。右議政臣穆白上。上問奉祀者子孫仁望。特召除官。

命有司。立大君廟於南郭下。

明年廟成。謂之至德祠云。

上之元年秋八月旁死魄翊日壬申。

外後孫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許穆記。


3. 문장별 번역과 해설

① 양녕대군의 신분

讓寧大君。我太宗長子也。初立爲世子。

“양녕대군은 우리 태종의 장자이다. 처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허목은 첫 문장에서 양녕대군이 태종의 장자이며 정식 왕세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② 명나라 사행과 영락제

野史曰。永樂五年。遣世子禔朝京師。帝遇之特厚。引升御座。執手與語。稱之曰賢王子也。厚賜之。

“야사에 이르기를, 영락 5년에 세자 제(禔)를 보내어 명나라 서울에 조회하게 하였다. 황제가 그를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여 가까이 불러 손을 잡고 이야기하며 ‘어진 왕자[賢王子]’라고 칭하고 후한 물품을 내렸다.”

허목은 양녕대군을 처음부터 무능하거나 방탕한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자 시절에는 명 황제에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는 점을 먼저 제시한다.


③ 곡부 공자묘 참배

及還。過曲阜。謁孔子廟。

“돌아오는 길에 곡부를 지나면서 공자의 사당을 참배하였다.”

양녕대군이 명나라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 들러 공자묘를 참배하였음을 기록하였다.


4. 「지덕사기」의 핵심 문장

弟忠寧大君生有聖德。百姓歸心。世子心知之。佯狂逃去以讓之。

“아우 충녕대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덕이 있어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갔다. 세자가 마음속으로 이를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피하여 그에게 양보하였다.

「지덕사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佯狂

佯 = 거짓으로 ~하는 체하다
狂 = 미치다

따라서 佯狂은 “거짓으로 미친 체하다”라는 뜻이다.

以讓之

“그에게 양보하기 위하여”라는 의미이다.

허목은 양녕대군의 행동을 단순한 방탕이나 실덕으로 해석하지 않고,

충녕대군의 성덕을 알아봄 → 일부러 광인처럼 행동함 → 세자 자리에서 물러남 → 충녕에게 양보함

이라는 구조로 이해하였다.

다만 이것은 매우 중요하게 구분해야 한다.

『태종실록』이 양녕대군의 행동을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한 의도적 행동’이라고 기록한 것은 아니다.

‘양녕의 의도적인 양위설’은 허목이 17세기에 제시한 역사적·도덕적 해석으로 보아야 한다.


5. 폐세자와 충녕대군

十六年。三公率文武百官。請廢之。立忠寧大君爲世子。是爲莊憲王。

“16년에 삼공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그를 폐할 것을 청하였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으니, 이분이 장헌왕이다.”

장헌왕(莊憲王)은 세종의 시호를 사용한 표현이다.


6. 태백·우중에 비유된 양녕대군

因放禔於廣州。一時擬之泰伯、虞仲。

“이에 제(禔)를 광주로 내보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태백과 우중에 견주었다.”

이 문장이 ‘지덕(至德)’이라는 사당 명칭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태백(泰伯)은 주나라 왕실의 인물로,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왕위를 동생 계력(季歷)에게 양보한 인물로 전해진다.

공자는 『논어』 「태백」에서 태백을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태백은 지극한 덕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

라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사당의 명칭 至德祠는 양녕대군을 태백과 같은 ‘양보의 덕’을 실천한 인물로 보는 역사 인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7. 양녕의 방탕에 대한 허목의 해석

好弋獵馳騁飮醉以自狂。無他事矣。

“활쏘기와 사냥, 말을 달리는 것을 좋아하고 술을 마시고 취하여 스스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였을 뿐, 다른 일은 없었다.”

이 문장 역시 중요하다.

허목은 양녕대군의 사냥·음주·방랑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앞의 佯狂, 즉 의도적으로 광인처럼 행동한 것과 연결한다.

따라서 허목의 논리에서는 양녕의 방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왕위에서 물러나기 위한 행동으로 재해석된다.


8. 세종은 형 양녕을 어떻게 대했는가

莊憲王卽位。尊禮之甚善。惟所意欲。一以順適爲心。

“장헌왕[세종]이 즉위한 뒤 그를 높이고 예우하기를 매우 잘하였다. 그가 뜻하고 원하는 바가 있으면 한결같이 뜻에 맞도록 해주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다.”

허목은 세종이 즉위한 뒤 형 양녕을 극진히 예우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허목의 서술 구조에서는 이것 역시 양녕의 양보와 세종의 보답이라는 형제 관계로 읽힌다.


9. 양녕대군의 죽음

大君以壽考終。

“대군은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양녕대군은 1394년에 태어나 1462년 세상을 떠났다.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에 이르는 긴 시대를 살았다.


10. 허목이 직접 지덕사 건립을 건의하다

上之元年。右議政臣穆白上。

“임금 원년에 우의정 신 목(穆)이 임금께 아뢰었다.”

여기서 臣穆은 바로 허목 자신이다.

‘상지원년(上之元年)’은 숙종 원년, 즉 1675년을 가리킨다.

허목은 당시 우의정으로서 숙종에게 양녕대군을 위한 사당 건립을 건의하였다.


후손을 찾아 제사를 받들게 하다

上問奉祀者子孫仁望。特召除官。

“임금이 제사를 받드는 자를 물으니 자손 인망(仁望)이었다. 특별히 불러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는 지덕사의 제향이 단순한 사당 건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양녕대군 후손의 봉사(奉祀) 문제까지 함께 정비되었음을 보여준다.


11. 지덕사의 건립

命有司。立大君廟於南郭下。

“유사에게 명하여 남곽 아래에 대군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明年廟成。謂之至德祠云。

“이듬해 사당이 완성되니 이를 ‘지덕사’라 하였다.”

따라서 「지덕사기」에 따르면,

1675년 숙종 원년
→ 우의정 허목이 건립 건의
→ 숙종이 허락
→ 사당 건립 명령
→ 이듬해 완공
→ ‘至德祠’라 칭함

이라는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12. 허목은 왜 자신을 ‘외후손’이라고 했는가

「지덕사기」 마지막에서 허목은 자신을 분명히

外後孫……許穆記

라고 기록하였다.

즉,

“외후손 허목이 기록한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외후손(外後孫)은 오늘날의 좁은 의미에서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 후손’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허목은 여성을 통해 양녕대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13. 허목과 양녕대군의 실제 혈연관계

계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실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

함양군 이포(咸陽君 李𧦞)

파징수 이종암(波澄守 李終巖)

정경부인 전주이씨(貞敬夫人 全州李氏)

전주이씨는 양녕대군의 증손녀이다.

그녀가 양천 허씨 가문의 허자(許磁)​와 혼인하면서 양녕대군의 혈통이 허씨 가문으로 이어졌다.


14. 허씨 가문으로 이어지는 계보

파징수 이종암의 딸 전주이씨
×
허자(許磁)

허강(許橿)

허교(許喬)

허목(許穆)

따라서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면,

양녕대군 → 허목

讓寧大君 李禔

咸陽君 李𧦞

波澄守 李終巖

貞敬夫人 全州李氏

許橿

許喬

許穆

이다.

허목의 부계 증조모가 양녕대군의 증손녀였다.


15. 허목의 친외가는 별개의 가문이다

허목의 아버지는 허교(許喬)​이고 어머니는 나주 임씨(羅州林氏)​이다.

나주 임씨는 유명한 문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딸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구별하면,

허목의 친외가
= 나주 임씨 임제 가문

이며,

양녕대군과의 혈연
= 아버지 허교의 할머니인 전주이씨를 통해 이어진 여계 혈통

이다.

따라서 “허목의 외가가 양녕대군 집안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허목은 부계 증조모를 통하여 양녕대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외후손(外後孫)이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16. 허목의 직계 가족관계

증조부

허자(許磁, 1496~1551)
조선 중기의 문신.

증조모

정경부인 전주이씨

양녕대군의 증손녀이며 파징수 이종암의 딸.

조부

허강(許橿)
전함사 별제를 지냈다.

부친

허교(許喬, 1567~1632)
포천현감 등을 지냈다.

모친

나주 임씨

백호 임제(林悌)​의 딸.

허목

許穆(1595~1682)
본관 양천, 자 문보(文甫), 호 미수(眉叟).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문신이며 우의정에 올랐다.

부인

전주이씨

완선군 이의전(李義傳)의 딸로 전해지며, 오리 이원익(李元翼) 가문과 연결된다.


17. 「지덕사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허목의 「지덕사기」는 단순한 사당 건립기가 아니다.

이 글에는 세 가지 의미가 겹쳐 있다.

첫째, 역사적 평가

폐세자 양녕대군을 ‘방탕하여 폐위된 왕세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충녕의 성덕을 알아보고 스스로 물러난 인물로 재해석하였다.

둘째, 유교적 평가

양녕대군을 왕위를 양보한 고대의 태백·우중에 비유하고, 이를 공자가 말한 ‘至德’​의 개념과 연결하였다.

셋째, 후손으로서의 추모

허목 자신이 양녕대군의 외후손이었다.

따라서 숙종에게 사당 건립을 건의하고 「지덕사기」를 남긴 것은 정치가 허목의 행위인 동시에 양녕대군의 여계 후손이 선조의 역사적 의미를 재평가하고 추모한 행위이기도 하다.


맺음말

허목의 「지덕사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世子心知之,佯狂逃去以讓之。
“세자가 마음속으로 이를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피하여 그에게 양보하였다.”

그리고,

一時擬之泰伯、虞仲。
“당시 사람들이 그를 태백과 우중에 견주었다.”

이 두 문장이 허목의 양녕대군관을 압축한다.

허목에게 양녕대군은 단순한 폐세자가 아니었다. 충녕의 성덕을 알아보고 스스로 물러났으며, 자신의 명예까지 희생한 ‘양보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허목은 숙종에게 사당 건립을 건의했고, 그 사당에는 공자가 태백에게 부여했던 최고의 덕목인 ‘至德’​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에 허목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밝혔다.

外後孫 許穆 記

“외후손 허목이 기록한다.”

지덕사기는 허목과 양녕대군을 연결하는 실제 혈연관계와 함께, 「지덕사기」를 쓴 허목 자신의 역사적 위치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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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어제「지덕사기(至德祠記)」원문과 해설


정조의 「어제 지덕사기(御製至德祠記)」는

정조 13년인 1789년(기유)에 지은 글입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4에 수록되어 있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도 1789년 작성된 「지덕사기」 원문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두 자료의 본문은 일치합니다.



1. 원문 전문

至德祠記

猗乎猗。德孰爲高。讓德爲高。讓孰爲至。讓名爲至。
故千乘大國也,簞豆小物也。苟爲其名趣舍,有時乎易施。
夫子贊泰伯之至德,必曰民無得稱焉者,豈不以讓國可能,而讓名不可能也歟。

予嘗論讓寧大君事,以爲其心雖慕乎泰伯,而其跡之難尋,難於泰伯。
大君,我太宗大王之冢子也。年十歲冊爲世子。
旣妙簡僚屬,夾輔以成就之矣。又躬覲天子,賜詩以寵嘉之矣。

乃自十六七,知世宗生有聖德,天與人歸,卽沈麴糵,放聲伎,佯狂自肆,十載如一日。
於是大君遂廢,而世宗竟自儲貳進登大位,禮明樂備,實啓我萬億年無疆之鞏基。

則此與泰伯之讓季歷,以成周業,其事恰相似。
然泰伯則逃之荊蠻,而大君則身不出於所讓之國。
泰伯則斷髮文身,而大君則但自處於衆汚之名。

彼毁冠裂冕,望望然入山林者,其讓國之跡,猶可彷想其一二。
若大君者,匪心之行,久假而不露;不屑之目,樂取而無厭。
歷事五朝,壽近七耋,而一時之賢士大夫,鮮有能窺其涯涘。

嗚呼,不亦難乎。猗乎猗,其善於讓名也。
然則泰伯後幾千載,至德之稱,非大君,伊誰當之。
惜乎無聖人者闡發幽光如泰伯也。

大君之祠,在漢城之南,而其號至德,肅廟所命也。
然且命號而已,未遑刻揭。
予以卽阼之十三年己酉,侑祭宣祠額,述其事,書于旁楣。

夫許由之有其人,未可知,其讓天下,尤未可信。
太史公尙以傳疑之法,特書於策曰:「箕山蓋有許由塚。」
則讓德之爲世所高久矣。
況是祠也,而其有不過而式之者乎。

猗乎猗。

장서각 소장 원문은 「己酉十二月 日 至德祠記」, 즉 1789년 12월의 글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2. 첫 문장 ― 정조가 말한 ‘지덕’의 핵심

德孰爲高。讓德爲高。
讓孰爲至。讓名爲至。

“덕 가운데 무엇이 높은가?
양보하는 덕[讓德]이 높다.

양보 가운데 무엇이 지극한가?
명예까지 양보하는 것[讓名]이 지극하다.

이것이 정조 「지덕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명제입니다.

정조는 단순히 **왕위를 양보하는 것[讓國]**보다 한 단계 높은 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讓名 ― 자신의 명예까지 양보하는 것

입니다.


3. 나라를 양보하는 것보다 명예를 양보하는 것이 어렵다

夫子贊泰伯之至德,必曰民無得稱焉者,豈不以讓國可能,而讓名不可能也歟。

“공자께서 태백의 지극한 덕을 찬양하면서 반드시 ‘백성들이 칭송할 길조차 없었다’고 하셨으니, 이는 나라를 양보하는 것은 가능해도 명예까지 양보하는 것은 가능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조는 『논어』 「태백」의 다음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民無得而稱焉。

공자는 태백이 천하를 양보하였으면서도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방법조차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정조는 여기에서 ‘讓名’이라는 새로운 해석의 핵심어를 끌어냅니다.


4. “양녕대군은 태백보다 더 어려운 길을 걸었다”

予嘗論讓寧大君事,以爲其心雖慕乎泰伯,而其跡之難尋,難於泰伯。

“내가 일찍이 양녕대군의 일을 논하면서 생각하기를, 그의 마음은 비록 태백을 사모하였지만, 그 자취를 찾아내기 어려움은 태백보다도 더하였다고 하였다.”

정조의 평가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입니다.

단순히

양녕대군 = 태백과 같은 사람

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조는 양녕의 처신이 태백보다 그 속뜻을 알아내기가 더 어려웠다고 평가합니다.


5. 양녕대군은 본래 정식 왕세자였다

大君,我太宗大王之冢子也。年十歲冊爲世子。

“대군은 우리 태종대왕의 맏아들이다. 열 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조는 양녕을 처음부터 왕위에 부적합했던 인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종의 적장자로 세자에 책봉되고 왕위 계승자로 교육받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旣妙簡僚屬,夾輔以成就之矣。又躬覲天子,賜詩以寵嘉之矣。

“이미 훌륭한 요속을 가려 뽑아 곁에서 보좌하며 그를 성취시키게 하였고, 또 몸소 천자를 알현하여 시를 내려 총애하고 아름답게 여김을 받았다.”

즉 세자 양녕은 왕세자로서 정상적인 교육과 외교 경험까지 갖추었다는 것이 정조의 서술입니다.


6. 정조가 해석한 양녕의 ‘양광(佯狂)’

이어 가장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乃自十六七,知世宗生有聖德,天與人歸,卽沈麴糵,放聲伎,佯狂自肆,十載如一日。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열여섯·일곱 살 무렵부터 세종께서 타고난 성덕이 있고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감을 알고, 곧 술에 빠지고 음악과 기예에 마음을 풀어놓으며 거짓으로 미친 사람처럼 스스로 방종하기를 십 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다.

여기서 핵심은 역시

佯狂 ― 거짓으로 미친 체하다

입니다.

앞서 허목의 「지덕사기」에도

佯狂逃去以讓之

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정조는 허목이 제시했던 ‘양광을 통한 양위’ 해석을 계승하면서 훨씬 더 체계적인 역사철학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출판 원고에서는 반드시 “정조가 이렇게 해석하였다”라고 써야 합니다. 이 문장은 실제 폐세자 사건의 내심을 입증하는 『태종실록』의 직접 증언이 아니라 정조의 후대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7. 양녕의 폐세자와 세종 즉위

於是大君遂廢,而世宗竟自儲貳進登大位,禮明樂備,實啓我萬億年無疆之鞏基。

“이에 대군은 마침내 폐위되고, 세종께서 마침내 세자의 자리에서 나아가 대위에 오르셨다. 예가 밝아지고 음악이 갖추어져 실로 우리 왕조가 만억 년 끝없이 이어질 튼튼한 기틀을 열었다.”

정조는 양녕의 폐세자와 세종 즉위를 단절된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논리 속에서는

양녕의 양보 → 세종의 즉위 → 세종의 성치 → 조선 왕조의 기반 확립

이라는 연속적인 역사로 이해합니다.


8. 태백과 양녕대군의 결정적 차이

此與泰伯之讓季歷,以成周業,其事恰相似。

“이는 태백이 계력에게 양보하여 주나라의 왕업을 이루게 한 것과 그 일이 꼭 서로 닮았다.”

그러나 정조는 곧바로 차이를 제시합니다.

泰伯則逃之荊蠻,而大君則身不出於所讓之國。

“태백은 형만의 땅으로 달아났지만, 양녕대군은 자신이 양보한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장이 이어집니다.

泰伯則斷髮文身,而大君則但自處於衆汚之名。

“태백은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하였지만, 대군은 다만 사람들이 더럽게 여기는 이름[衆汚之名]을 스스로 뒤집어썼다.

여기가 바로 정조의 독창적인 양녕대군론입니다.

태백은 왕위를 버리고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조선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정조는 양녕이 스스로

방탕한 사람
무도한 세자
폐세자

라는 불명예를 감수했다고 해석합니다.


9. 정조가 본 양녕의 가장 어려운 선택

彼毁冠裂冕,望望然入山林者,其讓國之跡,猶可彷想其一二。

“관을 부수고 면류관을 찢어버리고 멀리 산림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그가 나라를 양보했다는 자취를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즉 눈에 보이게 떠나버리면 후세 사람들이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달랐다고 정조는 말합니다.

若大君者,匪心之行,久假而不露;不屑之目,樂取而無厭。

이 문장은 뜻을 살려 번역하면,

“양녕대군과 같은 이는 본심이 아닌 행동을 오랫동안 가장하면서도 그 속뜻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평판을 기꺼이 취하여 싫어하지 않았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조가 말하는 양녕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조차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10. 다섯 왕을 섬겼지만 아무도 그의 속마음을 몰랐다

歷事五朝,壽近七耋,而一時之賢士大夫,鮮有能窺其涯涘。

“다섯 조정을 거치고 수명이 칠십에 가까웠으나, 당시의 어진 사대부들 가운데 그의 깊은 속뜻을 엿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양녕대군은 태종 이후 세종·문종·단종·세조의 시대까지 살았습니다.

정조는 그 긴 세월 동안에도 당대 사람들이 양녕의 참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해석합니다.


11. 정조가 내린 최고의 평가 ― 「善於讓名」

嗚呼,不亦難乎。猗乎猗,其善於讓名也。

“아! 이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아, 참으로 훌륭하도다. 그는 명예를 양보하는 데 뛰어났도다.

이 문장이 앞의

讓名爲至

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정조의 논리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讓國
왕위를 양보한다.

讓功
양보했다는 공로조차 내세우지 않는다.

讓名
좋은 이름과 명예마저 버린다.

至德
비로소 지극한 덕이 된다.


12. “태백 이후 지덕이라 부를 사람은 양녕대군뿐이다”

然則泰伯後幾千載,至德之稱,非大君,伊誰當之。

“그렇다면 태백 이후 수천 년 동안 ‘지덕’이라는 칭호를 양녕대군이 아니라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정조의 양녕대군 평가 가운데 가장 높은 찬사입니다.

이어 이렇게 탄식합니다.

惜乎無聖人者闡發幽光如泰伯也。

“안타깝게도 태백에게 공자가 있었던 것처럼, 그의 숨은 빛을 밝혀낼 성인이 없었을 뿐이다.”

즉 태백에게는 공자가 있어 그 덕이 후세에 알려졌지만, 양녕대군에게는 그러한 평가자가 없었기 때문에 참된 덕이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13. 숙종과 지덕사

大君之祠,在漢城之南,而其號至德,肅廟所命也。

“대군의 사당은 한성의 남쪽에 있으며, 그 이름을 ‘지덕’이라 한 것은 숙종께서 명하신 것이다.”

앞서 살펴본 허목의 「지덕사기」와 정확하게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허목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 원년인 1675년 허목이 사당 건립을 건의하였고, 이듬해 완성된 사당을 지덕사라 하였습니다.

정조도 약 110여 년 뒤 이 사실을 계승해 기록했습니다.


14. 정조 13년, 지덕사 편액을 내리다

然且命號而已,未遑刻揭。

“그러나 당시에는 이름만 명했을 뿐, 미처 새겨 걸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조가 직접 나섭니다.

予以卽阼之十三年己酉,侑祭宣祠額,述其事,書于旁楣。

“내가 즉위한 지 13년 되는 기유년(1789)에 제사를 올리게 하고 사당의 편액을 내리면서, 그 일을 서술하여 곁의 문미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1789년의 「어제 지덕사기」는 단순한 역사평론이 아니라 지덕사에 왕이 직접 사액하면서 지은 기문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장서각 소장본에도 기유년 12월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15. 마지막에 허유(許由)를 끌어온 이유

정조는 마지막에 고대의 은자 허유(許由) 이야기를 꺼냅니다.

夫許由之有其人,未可知,其讓天下,尤未可信。

“허유라는 사람이 실제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가 천하를 양보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그런데 사마천은 전승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箕山蓋有許由塚。

“기산에 아마 허유의 무덤이 있었던 듯하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정조가 말하려는 핵심은 허유의 실존 여부가 아닙니다.

讓德之爲世所高久矣。

“양보의 덕을 세상에서 높이 여겨온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는 사실입니다.


16. 마지막 문장

況是祠也,而其有不過而式之者乎。猗乎猗。

“하물며 이 지덕사를 지나면서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여기서 式之는 단순히 ‘보다’라는 뜻보다, 지나가면서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조는 지덕사를 단순한 왕족의 사당이 아니라 양보의 덕을 후세에 가르치는 상징적인 장소로 바라본 것입니다.


허목과 정조의 「지덕사기」를 비교하면

두 글을 함께 읽으면 양녕대군에 대한 후대 인식이 어떻게 발전했는지가 매우 잘 보입니다.

허목(1675년 무렵)

佯狂逃去以讓之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피함으로써 그에게 양보하였다.”

라고 하여 ‘양위(讓位)’ 또는 ‘양국(讓國)’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반면 정조(1789)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讓孰爲至?讓名爲至。

“양보 가운데 무엇이 지극한가? 명예를 양보하는 것이 지극하다.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허목의 양녕대군
→ 충녕의 성덕을 알아봄
→ 佯狂
→ 왕위를 양보함
泰伯과 같은 至德

정조의 양녕대군
→ 왕위를 양보함
→ 그 사실도 드러내지 않음
→ 오히려 방탕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스스로 감수함
왕위뿐 아니라 자신의 명예까지 양보함[讓名]
至德 덕 가운데 더욱 지극한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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