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와 남해 금산 선은전

       

태조 이성계와 남해 금산 선은전

― 건국의 기원에서 대한제국의 중흥까지

1. 남해 금산에 남은 태조의 흔적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에 우뚝 솟은 금산(錦山)은 남해의 절경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기암괴석 사이로 남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산중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보리암(菩提菴)이 자리한다.

그런데 금산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불교문화 못지않게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하늘에 기원하였다는 전승이다.

오늘날 보리암 인근 삼불암 아래에는 이와 관련된 기념 공간이 남아 있으며, 그 중심에 선은전(璿恩殿)​과 「남해금산영응기적비(南海錦山靈應紀蹟碑)」·「대한중흥송덕축성비(大韓中興頌德祝聖碑)」가 있다.

이곳을 단순히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곳’으로만 이해해서는 그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조선시대에 형성되고 전승된 태조의 건국 이야기와 19세기의 전패(殿牌) 봉안, 그리고 대한제국기 고종 황제의 중흥 의식이 한 장소에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보광산에서 금산으로

금산의 옛 이름은 보광산(普光山)​이었다고 전한다.

1903년(광무 7) 윤정구(尹定求)가 지은 「남해금산영응기적비」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錦山古普光山也

“금산은 옛 보광산이다.”

비문은 이어 산 아래 사람들이 전해오던 태조 이성계와 금산의 관계를 기록한다.

전승에 따르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여러 명산을 찾아 하늘에 기원하였으며, 마침내 남해 보광산에 이르러 제단을 마련하고 기원하였다.

오늘날 흔히 이를 ‘백일기도’라고 부르지만, 1903년 영응기적비는 삼불암 아래에 태조가 제사를 지냈던 단유(墠壝)의 옛터​가 남아 있다고 기록한다.

墠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땅을 닦아 마련한 곳이고, 壝는 제단을 둘러싼 경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비문의 기록만 놓고 본다면 태조의 행위는 단순한 불교적 기도라기보다 산천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의 뜻을 구한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전승은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태조실록』 등 태조 당대의 관찬 기록에서는 이성계가 금산에서 백일기도 또는 산제를 올렸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영응기적비 역시 이러한 이야기를 산 아래 사람들이 전해오던 전승으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금산에서 기도했다.”

라고 단정하기보다,

“남해 금산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산천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에 기원하였다는 전승이 오래도록 전해왔다.”

라고 서술하는 것이 타당하다.


3. ‘금산(錦山)’이라는 이름에 담긴 건국 전승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전승과 연결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영험을 베풀어 준 산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 은혜를 갚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었으므로, 산 이름에 비단을 뜻하는 금(錦)​자를 내려 ‘금산’이라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설화이지만 역사 연구에서는 역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태조가 실제로 교지를 내려 보광산을 금산으로 개칭했다는 사실이 태조 당대의 관찬 사료에서 명확하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 남해 지역에서 전승되었고, 마침내 1903년 영응기적비에 문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금산’이라는 지명은 단순한 산 이름을 넘어 조선 건국과 태조의 천명(天命)을 상징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해석되어 왔다.


4. 왕업을 예고한 ‘王’자의 상서

영응기적비에는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조가 금산에서 기원하던 때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났으며, 나뭇잎에는 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마치 왕(王)​자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이성계가 장차 왕이 될 것을 하늘이 미리 알려준 상서(祥瑞)​로 받아들였다.

왕조의 창업자에게 신비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동아시아의 건국설화에서 흔히 발견된다.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단순한 정치적 승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즉 천명과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영응기적비를 지은 윤정구는 이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오래된 문헌이 없어 상세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는 취지의 단서를 붙였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비문을 지은 사람 자신도 전승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5. 철종 10년, 전패를 봉안하다

금산의 태조 전승이 보다 구체적인 왕실 기념 공간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는 19세기에 나타난다.

영응기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哲廟己未奉安殿牌于山下

“철종 기미년(1859)에 산 아래에 전패를 봉안하였다.”

여기에서 哲廟는 철종을 가리키고, 기미년은 철종 10년인 1859년이다.

이 기록에 따라 적어도 1859년에는 금산 아래에 전패(殿牌)​를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패는 왕실 또는 국가적 권위를 상징하는 패이다. 다만 비문에는 이 대목에서 ‘태조의 전패’라고 장황하게 표현하지 않고 ‘殿牌’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엄밀한 서술에서는 원문 그대로 ‘전패를 봉안하였다’고 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금산의 태조 전승이 단순한 구전설화에 머무르지 않고 봉안과 의례를 수반하는 기념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 보리암에서 용문사로

전패는 처음 봉안된 장소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영응기적비에 따르면 이후 전패를 보리암(菩提菴)​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1898년(광무 2), 즉 비문에서 말하는 성상 무술년(聖上戊戌)​에 남해군에서 관부에 청하여 전패를 중조봉(中祖峯) 아래 용문사(龍門寺)의 불전 별당​으로 다시 옮겨 봉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별당은 제대로 된 왕실 기념시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정구는 이를 두고

制度草率

“제도가 초라하고 간략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이에 지역 사람들이 뜻을 모아 새로운 전각을 마련하고 돌을 다듬어 태조와 금산에 얽힌 일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지역사회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태조 건국 전승이 마침내 국가적 기념사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7. 고종 황제가 비문을 짓도록 명하다

지역민들이 전각과 비석을 마련하려는 뜻은 고종 황제에게까지 알려졌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기고 당시 의정부 찬정이었던 윤정구(尹定求)​에게 그 내력을 기록하는 글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 1903년(광무 7) 5월 세워진 것이

「南海錦山靈應紀蹟碑」
남해금산영응기적비

이다.

이는 단순한 지방 향토비가 아니다.

지역에서 전승된 태조의 건국 이야기 → 19세기 전패 봉안 → 지역민의 기념사업 → 고종 황제의 재가 → 윤정구의 비문 찬술

이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기념물이다.

따라서 영응기적비는 남해 금산의 이성계 전승이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공적인 역사기억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8. 또 하나의 비, 「대한중흥송덕축성비」

그런데 이곳에는 영응기적비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大韓中興頌德祝聖碑」
대한중흥송덕축성비

가 세워졌다.

두 비가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대한중흥(大韓中興)’은 대한제국의 중흥을 의미하고, ‘송덕(頌德)’은 황제의 덕을 칭송한다는 뜻이며, ‘축성(祝聖)’은 황제의 장수와 성수(聖壽)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비문은 고종 황제가 원구단(圜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국의 의례와 제도를 정비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면서 대한제국의 중흥을 칭송한다.

이 비석이 태조 이성계의 금산 기도 전승을 기록한 영응기적비와 함께 세워졌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9. 태조의 ‘창업’과 고종의 ‘중흥’

두 비석을 함께 읽으면 1903년 이곳에 기념 공간을 조성한 사상적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태조 이성계는 금산에서 하늘에 기원하여 천명을 받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약 500년 뒤 고종은 조선의 국왕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올라 새로운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두 비가 보여주는 역사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금산에서의 기원과 영응(靈應)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創業)

500년 왕조의 계승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대한제국의 중흥(中興) 기원

1903년의 기념사업은 결국 태조의 창업과 고종의 중흥을 하나의 역사적 맥락으로 연결하려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태조가 하늘의 뜻을 받아 조선을 세웠듯이 고종 황제가 국난을 극복하고 대한제국을 중흥시키기를 기원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남해 금산의 두 비석은 단순한 태조 기념물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을 어떻게 계승하고 재해석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10. ‘선은전(璿恩殿)’에 담긴 뜻

오늘날 두 비를 보호하는 비각에는

璿恩殿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은전’이라 읽는다.

문화유산 해설에서는 선은(璿恩)을 ‘하늘의 은덕을 입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영응기적비와 대한중흥송덕축성비의 내용을 함께 읽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이곳에서 말하는 ‘은(恩)’은 단순히 개인이 복을 받았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태조가 산천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에 기원하여 영응을 얻었으며, 마침내 왕업을 이루었다는 건국 전승과 연결된다.

따라서 선은전은

기원(祈願) → 영응(靈應) → 천명(天命) → 창업(創業)

이라는 태조의 건국 전승을 상징하는 공간이면서, 대한제국기에는 다시

창업(創業) → 계승(繼承) → 중흥(中興)

이라는 왕조의 역사적 정통성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11. 전설과 역사가 만나는 공간

남해 금산 선은전의 역사적 가치는 전승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승이 어떻게 형성되고, 조선 후기에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대한제국기에 어떻게 국가적 역사기억으로 다시 구성되었는가​를 보여준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실제로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하였는지는 현재의 사료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금산 일대에 이성계의 산제와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졌고, 19세기에는 전패를 봉안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고종 황제의 명으로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졌다.

전설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계승되고, 마침내 비문과 전각이라는 구체적인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것이다.


맺음말 ― 건국의 기원에서 대한제국의 중흥까지

남해 금산의 선은전과 두 비석은 조선과 대한제국을 잇는 독특한 역사문화 공간이다.

1903년 「남해금산영응기적비」는 금산이 옛 보광산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산천에 제사를 올리고 왕업을 기원했다는 전승을 기록하였다.

또한 비문은 철종 10년인 1859년 산 아래에 전패를 봉안하고, 이후 보리암을 거쳐 1898년 용문사 별당으로 옮긴 과정까지 전한다.

그리고 1903년 고종 황제의 명으로 윤정구가 그 내력을 기록하여 영응기적비를 세웠다.

같은 때 세워진 「대한중흥송덕축성비」는 그 의미를 한 단계 더 확장하였다.

태조의 조선 창업과 고종의 대한제국 중흥을 서로 연결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산은 한 사람의 기도처를 넘어 왕조의 시작과 계승, 그리고 중흥을 기원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해의 산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금산 한편에 남아 있는 선은전과 두 비석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한 시대의 전승은 어떻게 역사적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다시 어떻게 국가와 왕조의 정통성을 설명하는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바로 남해 금산 선은전(璿恩殿)​에 남아 있다.


주요 사료 및 참고문헌

  • 윤정구(尹定求), 「南海錦山靈應紀蹟碑」, 1903(광무 7).
  • 윤정구(尹定求), 「大韓中興頌德祝聖碑」, 1903(광무 7).
  • 이우선(李友善), 『錦山記』, 1865.
  • 김해영, 「南海郡錦山의 ‘傳李太祖祈壇’에 관하여」, 『남명학연구』 제19집, 2005.
  • 『한국사찰전서』 수록 남해 금산 관련 금석문 자료.
  • 국가유산 관련 「남해금산영응기적비·대한중흥송덕축성비」 문화유산 해설자료.

※ 태조의 금산 기도·산제와 금산 명명 이야기는 태조 당대의 『태조실록』에서 직접 확인되는 사실이라기보다 후대 문헌과 금석문에 전하는 ‘태조 건국 전승’​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반면 1859년 전패 봉안, 이후 보리암 이봉, 1898년 용문사 이봉 및 1903년 비 건립 과정은 「남해금산영응기적비」의 기록에 근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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