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암 이간의 학문

 

1. 『외암유고』에서 확인되는 주요 왕복서신

연도상대『외암유고』 기록주요 내용
1709 己丑최징후「與崔成仲」 권7한원진 학설을 전달받아 본연지성·기질지성·미발·오상을 비판적으로 검토
1709 己丑윤혼「與尹晦甫」 권8심(心)·성(性)·정(情), 허령·지각, 사성·사단 논변
연대 미상윤혼「與尹晦甫」 권8앞 편지에 이어 이기·심성 문제를 재논변
1712 壬辰한원진「答韓德昭別紙」 권7인물성·오상·미발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직접 논쟁
1713 癸巳한원진「與韓德昭」 권7앞선 논쟁의 계속
1713 癸巳현상벽「答玄彦明」 권7학문·의리 및 성리학적 문제에 관한 교유
1714 甲午현상벽「與玄彦明」 권7심성·본연·기질 문제 논의
1716 丙申현상벽「與玄彦明」 권7학문적 교류 지속
1719 己亥윤혼「與尹晦甫」 권8윤혼의 급제를 축하하고 출처·의리·선비의 자세를 권면
1721 辛丑한원진·채지홍「與韓德昭蔡君範」 권7강문 학자들과의 논변 지속

『외암유고』 권7의 목차 자체에 「答韓德昭別紙 壬辰」, 「與韓德昭 癸巳」, 「答玄彦明 癸巳」, 「與玄彦明 甲午·丙申」 등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권8에는 윤혼에게 보낸 「與尹晦甫 己丑」·「與尹晦甫」·「與尹晦甫 己亥」가 연이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2. 1709년 ― 이간과 윤혼의 직접 성리학 논변

이 부분은 앞으로 온양 유학을 설명할 때 매우 중요하게 활용할 수 있겠습니다.

윤혼의 자는 회보(晦甫)입니다. 『외암유고』 권8 첫머리에 바로

與尹晦甫 己丑

이 실려 있습니다.

기사년은 1709년입니다.

이간은 편지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心是揔名。而其體謂之性。其用謂之情。

직역하면,

“심(心)은 총괄하는 이름이다. 그 체(體)를 성(性)이라 하고 그 용(用)을 정(情)이라 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이간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心是氣也。而虗靈。其體也。知覺。其用也。性是理也。

즉,

“심은 기이며 허령(虛靈)은 그 체이고 지각(知覺)은 그 용이다. 성은 이(理)이다.”

라는 논의를 전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안부편지가 아닙니다.

심(心)·성(性)·정(情)
이(理)·기(氣)
허령(虛靈)·지각(知覺)
사성(四性)·사단(四端)

이라는 조선 성리학의 핵심 문제를 이간과 윤혼이 직접 논하고 있습니다.


3. 더욱 중요한 것은 ‘來諭’입니다

편지에는 계속해서

來諭曰……

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보내온 편지에서 말씀하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간 혼자 자신의 철학을 윤혼에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윤혼이 먼저 자신의 견해를 이간에게 보내고, 이간이 그것을 조목조목 검토하여 답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간은 윤혼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來諭曰。四端情也。情豈可謂之理也云云。

이라고 기록합니다.

뜻은 대략,

“보내온 글에서 ‘사단은 정(情)인데 정을 어찌 이(理)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명백한 왕복 성리학 논변입니다.


4. 윤혼과의 두 번째 편지 ― 논쟁이 계속되다

바로 다음에 연대가 표시되지 않은 또 하나의

「與尹晦甫」

가 이어집니다.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虗靈知覺。氣也。四性四端。卽所盛所乘之理也。

대략,

“허령과 지각은 기이고, 사성과 사단은 곧 그 속에 담기고 그것을 타고 나타나는 이(理)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간은 자신의 견해를 압축하여

鄙說宗旨。不過如此。

즉,

“나의 학설의 종지는 이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이간의 심성론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문장입니다.


5. 1709년 ― 한원진과의 논쟁은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시작

같은 해 『외암유고』 권7 「與崔成仲 己丑」을 보면 이간이 최징후를 통해 한원진(韓德昭)의 글을 읽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得見韓德昭抵老兄別紙

즉,

“한덕소가 그대에게 보낸 별지를 얻어 보았다.”

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에서 이간이 한원진에 대해

柬於德昭。未及相識

이라고 썼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덕소와 아직 서로 알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따라서 1709년 당시 이간과 한원진은 아직 직접적인 친교가 깊지 않았고, 다른 강문 제자들의 서신을 통해 서로의 학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호락논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6. 이때 이미 인물성 논쟁의 씨앗이 나타납니다

1709년 이간은 한원진의 학설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人物均受五行之氣……於其五者之中。謂一有而一無則不可。

요지는,

“사람과 사물은 모두 오행의 기를 받았으므로 그 편전(偏全)의 정도는 다르지만, 오상 가운데 어떤 것은 있고 어떤 것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이간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으로 발전하는 핵심적인 사고입니다.

따라서 호락논쟁의 중요한 사상적 단서는 적어도 1709년 이간의 편지에서 이미 뚜렷하게 확인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1712년 ― 이간과 한원진의 직접 논쟁

『외암유고』 권7에는

「答韓德昭別紙 壬辰」

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임진년은 1712년입니다.

이제 상대가 최징후가 아니라 한원진 자신입니다.

따라서

1709년 — 다른 동문을 통해 한원진 학설 검토
↓
1712년 — 한원진과 직접 왕복 논변

이라는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술 연구에서도 「答韓德昭別紙 壬辰」은 이간의 인물성동론을 보여주는 핵심 문헌으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8. 이간의 핵심 ― 一原과 異體

한원진과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一原異體

일원이체

입니다.

쉽게 말하면,

一原 — 근원적 원리는 하나다.
異體 — 현실에 나타난 개별 존재의 모습은 다르다.

는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은 기질·형체·능력에서는 다르지만 그 본연의 성, 즉 이(理)의 근원에서는 동일하다는 방향으로 이간의 철학이 발전합니다.

이것이 훗날

人物性同論

인물성동론

으로 정립됩니다.

반면 한원진은 현실적인 기질과 존재 차이를 보다 강하게 강조하여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전개합니다.


9. 현상벽은 이간 쪽에 섰습니다

이 부분은 현상벽 자신의 문집 『관봉유고(冠峯遺稿)』에서 아주 명확하게 확인됩니다.

현상벽은 「오상변(五常辨)」에서 당시 학자들의 입장을 직접 나눕니다.

巍巖李公擧……與愚。主乙者也。

즉 “외암 이공거(이간)와 나[현상벽] 등은 을설을 주장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을설은 사람과 사물이 모두 오상의 덕을 갖추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현상벽이 이간의 인물성동론 쪽에 있었다는 것은 후대의 분류만이 아니라 당사자 자신의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10. 1713~1716년 ― 이간과 현상벽의 지속적인 서신

『외암유고』 권7에는 현상벽에게 보낸 편지가 연이어 나타납니다.

「答玄彦明 癸巳」 — 1713
「與玄彦明 甲午」 — 1714
「與玄彦明 丙申」 — 1716

등입니다.

즉 현상벽과 이간의 관계 역시 단순한 학파 분류가 아니라 수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한 실제 학문적 교유 관계였습니다.


11. 1719년 ― 윤혼의 급제를 축하한 이간

『외암유고』 권8에는 또 하나 중요한 편지가 있습니다.

「與尹晦甫 己亥」

기해년은 1719년입니다.

이간은 첫머리에서

老兄一第。眞令人增氣。

라며 윤혼의 급제를 크게 기뻐합니다. 실제 윤혼은 1719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축하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간은 윤혼에게 관직에 나아가더라도 세속에 휩쓸리지 말고 의리를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只願持循義理。無自汙辱。

즉,

“다만 의리를 지켜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당부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2. 따라서 윤혼에 대한 평가는 수정·보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윤혼에 대해 “이간과 함께 강학했지만 인물성동론 계열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린 것은 신중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외암유고』와 관련 문집을 더 확인해 보니 한 단계 더 나아가 말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현상벽의 『관봉유고』 「오상변」에는 당시 논쟁 참여자를 두 편으로 나누면서 이간과 함께 “尹晦甫鳳巖” 등이 을설을 주장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의 윤회보는 천서 윤혼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외암유고』에도 윤혼과 이간의 심성론 왕복 논변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윤혼은 단순한 강학 동료를 넘어 인물성·오상 문제에서 이간과 상당 부분 견해를 공유했던 강문 학자로 평가할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세부 쟁점마다 이간과 완전히 동일했다고 확대 해석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13. 네 학자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면

이제 훨씬 선명합니다.

수암 권상하(權尙夏)
↓
강문 학술 공동체
↙     ↓     ↘
이간 ─ 윤혼 ─ 현상벽  한원진
人物性同·五常 공유 방향      人物性異 방향
↓                 ↓
낙론으로 발전         호론으로 발전

물론 호락논쟁의 후대 학파 구도를 이 시기의 모든 인물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간·윤혼·현상벽이 오상과 인물성 문제에서 한원진과 다른 방향을 취했다는 사실 자체는 당대 문집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출판 원고에서 특히 강조할 만한 결론

이 자료들을 종합하면 외암정사·관선재의 역사적 의미도 더 커집니다.

외암정사는 단순히 이간이 책을 읽던 산중 서재가 아니었습니다. 권상하 문하에서 형성된 학문이 이간과 윤혼의 직접적인 심성론 논변을 통해 온양에서 연구·강론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술 네트워크는 한원진·현상벽 등과 연결되어 훗날 조선 후기 성리학사의 대표적 논쟁인 호락논쟁으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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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 「與尹晦甫 己丑」

1709년, 천서 윤혼에게 보낸 편지

출전: 『巍巖遺稿』 卷之八, 書, 「與尹晦甫 己丑」.

윤혼의 晦甫(회보)는 자(字)입니다. 따라서 제목은

與尹晦甫 己丑
여윤회보 기축

즉 「윤회보에게 주다 — 기축년」, 자연스럽게는 「윤혼에게 보낸 편지, 1709년」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1. 心·性·情의 관계

핵심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心是揔名。而其體謂之性。其用謂之情。

음독

심시총명. 이기체위지성. 기용위지정.

직역

“심(心)은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그 체(體)를 성(性)이라 하고, 그 용(用)을 정(情)이라 한다.”

해설

이 편지의 출발점입니다.

이간은 인간의 마음을

心
→ 體 : 性
→ 用 : 情

이라는 구조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이것은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말한 설명[合理氣而言]이라고 밝힙니다.

즉 이간은 ‘마음=성’이라고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성과 정, 이와 기가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2. 心은 氣, 性은 理

이어지는 문장이 특히 중요합니다.

心是氣也。而虗靈。其體也。知覺。其用也。性是理也。

음독

심시기야. 이허령, 기체야. 지각, 기용야. 성시리야.

직역

“심은 기이다. 허령(虛靈)은 그 체이고, 지각(知覺)은 그 용이다. 성은 이(理)이다.”

여기서 이간의 기본 구도가 분명해집니다.

心 = 氣

그 마음의
體 = 虛靈
用 = 知覺

그리고

性 = 理

입니다.

虛靈이란?

虛靈(허령)은 마음이 텅 비면서도 신령스럽게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욕이나 특정한 사물에 막히지 않아 만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四性과 四端

이간은 다시 성(性)을 체용으로 나눕니다.

四性 — 체(體)
四端 — 용(用)

여기서 사성은

仁·義·禮·智

이고 사단은 『맹자』의

惻隱之心 — 仁의 단서
羞惡之心 — 義의 단서
辭讓之心 — 禮의 단서
是非之心 — 智의 단서

입니다.

따라서 이간에게는

仁義禮智라는 성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다가 → 실제 상황에서 측은·수오·사양·시비의 마음으로 발현되는 것

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4. 이간이 제시한 핵심 명제

그리고 매우 유명한 성리학 명제가 등장합니다.

未發而統四性。已發而統四端。故曰心統性情也。

음독

미발이통사성. 이발이통사단. 고왈심통성정야.

직역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사성을 통괄하고, 이미 발하였을 때에는 사단을 통괄한다. 그러므로 ‘심은 성과 정을 통괄한다’고 하는 것이다.”

해설

여기서 중요한 것이

心統性情

심통성정

입니다.

마음은

未發 — 아직 감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性을 통괄하고

已發 — 사물에 접하여 감정이 발하면 情을 통괄한다

는 것입니다.

이간은 이 구조를 바탕으로 윤혼과 본격적인 논쟁을 벌입니다.


5. 윤혼이 반론을 제기하다

여기서부터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간은 윤혼이 보내온 편지를 직접 인용합니다.

來諭曰。四端情也。情豈可謂之理也。

음독

래유왈, 사단정야. 정기가위지리야.

뜻

“보내온 글에서 말하기를, ‘사단은 정(情)인데, 정을 어찌 이(理)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즉 윤혼이 이간의 학설을 듣고 직접 반론을 제기했고, 이간이 윤혼의 질문에 다시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외암정사에서 함께 공부했다.”

정도로 설명해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는 성리학의 핵심 명제를 놓고 왕복 논쟁을 한 학문적 동료였습니다.


6. 윤혼의 문제제기

윤혼의 문제는 매우 논리적입니다.

사단은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情입니다.

그런데 이간이 그것을 理의 측면에서도 설명합니다.

그러자 윤혼이 묻습니다.

“情인데 어떻게 理라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이간은

情 전체를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라는 현상 속에서 그 근거가 되는 이만을 지목해 말할 수 있다

는 방식으로 답합니다.

즉 이간에게 중요한 것은

單指

단지

입니다.

현실에는 이와 기가 함께 있지만, 분석적으로 그 가운데 이만을 가리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윤혼의 두 번째 반론

윤혼은 다시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견해를 제시합니다.

四端氣也。而以仁義禮智流行於此。

즉,

“사단은 기이고, 인의예지라는 이가 그 안에서 유행하는 것이다.”

라는 견해입니다.

표면상 비슷해 보이지만 이간은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仁義禮智 = 하나의 것
四端 = 또 다른 것

처럼 분리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8. 이간의 ‘端’ 해석

이간의 반론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는 端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파고듭니다.

‘端’은 어떤 물건과 전혀 다른 별개의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밖으로 드러난 단서·실마리입니다.

그러므로

仁과 惻隱之心

을 서로 전혀 다른 두 물건처럼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仁이라는 내면의 본성이 밖으로 처음 드러난 모습이 惻隱之心이다.

따라서 성과 사단은

서로 분리된 두 존재가 아니라 체와 용의 관계

라는 것입니다.


9. 知覺 문제로 논쟁이 확대되다

윤혼은 또 묻습니다.

知覺氣也。知覺之理。當屬何性。

음독

지각기야. 지각지리, 당속하성.

뜻

“지각은 기라고 한다면, 지각의 이(理)는 어느 성에 속하는가?”

아주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만약 이간이

知覺 = 氣

라고 한다면,

그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理는 仁義禮智 가운데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입니다.


10. 이간의 반문

이간은 이에 직접 답하기보다 윤혼에게 역으로 묻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허령도 기라고 하였는데, 허령의 이(理)는 어느 성에 속하는가?”

즉 윤혼의 질문 방식 자체를 다시 검토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知覺과 四端은 하나인가, 둘인가?

이 질문이 두 사람의 논쟁을 관통합니다.


11. 智에 두 개의 用이 생기는 문제

윤혼은 是非之心을 지(智)의 작용이라고 보면서 동시에 知覺도 지(智)의 작용과 관련시켜 설명했습니다.

이간은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是非도 智의 用

그런데

知覺도 智의 用

이라고 하면

智에는 두 개의 用이 생긴다.

반면 마음 자체에는 고유한 작용이 없어지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간은

知覺은 心의 用

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2. 첫 번째 편지의 핵심

첫 편지는 결국 다음 문제로 압축됩니다.

이간

心 = 氣
虛靈 = 心의 體
知覺 = 心의 用

그리고

性 = 理
四性 = 性의 體
四端 = 性이 현실에서 발현된 用

따라서

心統性情

이라는 구조입니다.


두 번째 「與尹晦甫」

첫 편지만 읽으면 논쟁이 끝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외암유고』에는 바로 다음에 또 하나의 **「與尹晦甫」**가 이어집니다.

첫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虗靈知覺。氣也。四性四端。卽所盛所乘之理也。

음독

허령지각, 기야. 사성사단, 즉소성소승지리야.

직역

“허령과 지각은 기이다. 사성과 사단은 곧 그 안에 담기고 그것을 타고 나타나는 이(理)이다.”


13. 이간이 자신의 학설을 직접 요약하다

이어 결정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鄙說宗旨。不過如此。

음독

비설종지, 불과여차.

번역

“나의 학설의 종지는 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이간 자신의 심성론을 가장 짧게 요약한 문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이간의 기본 구조

虛靈·知覺 = 氣

그 속에 담기고 그것을 타고 작용하는

四性·四端 = 理

입니다.


14. 윤혼은 이간을 ‘理氣互發’로 이해했는가

이 편지에서 윤혼은 이간의 학설을

心과 性에 두 개의 작용이 있고, 理와 氣가 서로 발한다

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간은 강하게 부정합니다.

이간이 자신의 학설을 설명하면서 특히 경계하는 것이

二用互發

두 작용이 서로 따로 발한다

는 설명입니다.

그는 율곡 이후에 태어난 자신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없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이 대목에서 이간의 율곡학 계승 의식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5. 두 사람의 실제 견해 차이

복잡한 원문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쟁점이간윤혼
心氣를 중심으로 설명기본적으로 氣임을 인정
虛靈心의 體견해 차이 존재
知覺心의 用智 및 四端과 밀접하게 파악
性理理
四性性의 體인정
四端性의 理가 발현된 측면情·氣의 측면을 더 강조
理氣하나의 발용 속에서 분석知覺·四端을 상대적으로 구별
핵심 논점一用의 구조知覺과 四端의 구별 문제

다만 이 표를 “이간은 이렇고 윤혼은 정반대였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은 기본적인 기호 성리학의 틀을 공유하면서 심·성·지각·사단을 어떻게 세밀하게 구분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한 것입니다.


16. 이간이 윤혼에게 상당히 강하게 비판한 부분

두 번째 편지는 학술적으로 상당히 치열합니다.

이간은 윤혼의 논리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도 편지 마지막에서는 윤혼에게 정신을 잘 보존하고 마음을 비워 다시 반복해서 생각해 달라는 취지로 권합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단순한 철학 논문이 아니라

친구 사이의 왕복 질문 → 반론 → 재반론 → 다시 검토 요청

이라는 살아 있는 학술 토론입니다.


17. 이 편지가 특히 중요한 이유

이번에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니, 윤혼에 대한 기존 평가를 상당히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혼은 단순히

“외암 이간의 사돈이며 관선재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1709년 이미 이간과

心·性·情
理·氣
虛靈·知覺
四性·四端
未發·已發

이라는 성리학의 핵심 문제를 직접 왕복 논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윤혼은 외암 이간의 중요한 학문적 토론자로 평가해야 합니다.


18. 외암정사와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커집니다

앞서 『외암유고』 「외암정사개기제토지문」에서 이간은 1707년 외암정사를 세우며

二三志同 欲謀羣居

즉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과 함께 모여 살고자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인 1709년, 이간과 윤혼 사이에서 이처럼 깊은 성리학 왕복 논변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두 자료를 함께 놓으면 매우 중요한 그림이 만들어집니다.

1707 외암정사 건립
↓
동지들과 함께 학문할 공동 강학 공간 구상
↓
이간·윤혼의 관선재 강학
↓
1709 이간·윤혼 심성론 왕복논변
↓
강문 학자들과 인물성·미발·오상 논쟁
↓
호락논쟁으로 발전

이렇게 보면 외암정사·관선재는 단순한 지역 서당이 아니라 조선 후기 기호 성리학의 주요 학술논쟁이 이루어진 온양의 강학 공간이라는 평가가 훨씬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출판 원고에는 이렇게 정리하는 것을 권합니다.

1709년 이간과 윤혼 사이에 오간 성리학 논변은 외암정사의 학문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간은 윤혼에게 보낸 「與尹晦甫」에서 심·성·정, 이·기, 허령·지각, 사성·사단의 관계를 세밀하게 논하였다. 윤혼 역시 자신의 견해를 서신으로 제시하고 이간의 논리를 비판했으며, 이간은 다시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따라서 외암 이간과 천서 윤혼의 관계는 단순한 사돈이나 벗의 관계를 넘어, 성리학의 핵심 문제를 함께 탐구한 학문적 동지이자 논쟁 상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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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과 천서 윤혼의 왕복서신

― 1709년 심성론 논변에서 1719년 급제 축하 서신까지

1. 현재 확인되는 서신 자료

『외암유고』 권8의 목차에는 윤혼에게 보낸 편지가 세 편 연속해서 실려 있습니다. 첫째 「與尹晦甫 己丑」, 둘째 연대가 적혀 있지 않은 「與尹晦甫」, 셋째 「與尹晦甫 己亥」입니다. 각각 1709년, 앞 편에 이어지는 심성론 논변, 1719년 편지로 볼 수 있습니다.

연도발신 → 수신사료성격
1709 己丑이간 → 윤혼『외암유고』 권8 「與尹晦甫 己丑」心·性·情, 虛靈·知覺, 四性·四端 논변
1709 전후 추정이간 → 윤혼『외암유고』 권8 「與尹晦甫」앞 논쟁의 재반론
1710 庚寅 10월한원진 → 윤혼, 겸 이간『남당집』 권11 「答尹晦甫焜兼呈李公擧」이간·윤혼의 견해 비교
1712 壬辰 9월한원진 → 윤혼『남당집』 권11 「答尹晦甫別紙」윤혼이 이간의 글을 높이 평가한 사실 확인
1719 己亥이간 → 윤혼『외암유고』 권8 「與尹晦甫 己亥」윤혼의 문과 급제 축하·출처의리 권면

2. 1709년 첫 번째 편지

「與尹晦甫 己丑」

이 편지는 두 사람의 학문적 관계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편지 첫머리에서 이간은 자신의 심성론을 제시합니다.

心是揔名……其體謂之性,其用謂之情。

핵심 뜻은

“마음[心]은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며, 그 체를 성[性], 그 용을 정[情]이라고 한다.”

입니다. 이어 이간은 심을 기(氣), 성을 이(理)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허령(虛靈)을 심의 체, 지각(知覺)을 심의 용으로 설명합니다.

이를 도식화하면

心
→ 體 : 虛靈
→ 用 : 知覺

性
→ 體 : 四性〔仁義禮智〕
→ 用 : 四端〔惻隱·羞惡·辭讓·是非〕

이라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간은 이를 心統性情, 즉 마음이 성과 정을 통괄한다는 구조로 설명합니다.


3. 윤혼의 원편지를 복원할 수 있는 결정적인 말 ― 「來諭曰」

이간의 편지에는

來諭曰 — “그대가 보내온 글에서 말하기를”

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간 자신의 말이 아니라 윤혼의 선행 편지를 이간이 인용한 것입니다.

이를 따로 뽑아보면 윤혼이 이간에게 제기한 질문의 핵심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윤혼의 첫 번째 문제제기

四端情也。情豈可謂之理也。

“사단은 정(情)인데, 정을 어떻게 이(理)라고 할 수 있는가?”

윤혼은 이간이 사단을 이의 측면에서 설명하는 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두 번째 문제제기

윤혼의 견해는 대략

“사단은 기(氣)이고, 인의예지의 이(理)가 그 가운데 유행하기 때문에 이의 측면에서 말할 수도 있다.”

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간과 윤혼의 미묘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윤혼은 四端이라는 실제 정(情)의 발현과 그 안에서 작용하는 仁義禮智의 理를 상대적으로 구분하려 했습니다.

반면 이간은 그렇게 지나치게 분리하면

四性과 四端이 서로 다른 두 물건처럼 되어버린다

고 비판합니다.


4. 윤혼의 세 번째 질문 ― 知覺은 무엇인가

윤혼은 다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知覺氣也。知覺之理。當屬何性。

즉,

“지각이 기라면, 지각에 있는 이는 인·의·예·지 가운데 어느 성에 속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상당히 수준 높은 철학적 문제입니다.

이간은

知覺 = 心의 用

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윤혼은 지각을 특히 智의 작용과 밀접하게 연결하여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이간은

“시비지심도 智의 용이고 知覺도 智의 용이라면 智에 두 개의 용이 생기지 않는가?”

라고 되묻습니다.


5. 윤혼의 편지를 부분적으로 복원하면

여기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 내용은 윤혼의 독립된 원편지 전문이 아니라 이간의 답서에 인용된 ‘來諭’를 순서대로 모아 구성한 복원 개요입니다.

윤혼은 이간에게 대략 다음 문제들을 질문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사단은 정인데 어떻게 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단은 기이고 인의예지의 이가 그 가운데 유행한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지각이 기라면 그 지각의 이는 어느 성에 속하는가.
지각 자체에도 이와 기가 있고 사단에도 이와 기가 있는데, 어찌 지각과 사단을 이와 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내용은 『외암유고』 권8의 이간 답서에서 직접 확인되는 윤혼의 질문들을 재배열한 것입니다. 따라서 출판할 때는 반드시 **「윤혼 원서신의 복원적 요지」**라고 표시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6. 두 번째 「與尹晦甫」 ― 이간의 재반론

이어지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간은 자신의 학설을 더욱 선명하게 정리합니다.

그 유명한 문장이

鄙說宗旨。不過如此。

입니다.

즉,

“나의 학설의 종지는 이에 지나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그 바로 앞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간은

虛靈·知覺 = 氣의 측면
四性·四端 = 그 가운데 담기고 그것을 타고 나타나는 理의 측면

이라고 설명합니다.


7. 두 번째 편지에서도 윤혼의 반론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윤혼은 이간에게 다시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습니다.

“지각에도 이기가 있고 사단에도 이기가 있는데, 어떻게 지각은 기, 사단은 이라고 갈라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이간이

“지각을 사단의 그릇으로 보고 사단을 지각이 싣고 있는 이로 본다.”

고 이해하고, 자신에게는 처음 듣는 주장이라 매우 의아하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 윤혼은 단순히 이간의 설명을 받아 적은 제자가 아닙니다.

이간의 논리적 구조 자체를 분석하고 그 모순 가능성을 따지는 동등한 토론자였습니다.


8. 지각과 사단 ― 두 사람의 가장 큰 쟁점

두 번째 편지에서 윤혼은 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견해를 제시합니다.

“허령은 사성을 갖출 수 있지만, 이미 발한 뒤에는 사성이 각각 스스로 발용한다. 지각해야 할 때 지각하고, 측은해야 할 때 측은하므로, 하나의 지각이 여러 이치를 겸한다고 볼 수 없다.”

이간은 이에 반대합니다.

윤혼은 또

知覺과 四端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이고, 智가 여러 이치를 묘하게 운용하고 만물을 주재하므로 知覺이 四端과 七情을 포괄한다

는 방향으로 설명했습니다.

이간은 여기서 윤혼의 앞뒤 설명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즉,

한편에서는 知覺을 四端 가운데 하나처럼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知覺이 四端 전체를 포괄한다

고 하니 논리적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9. 1710년 한원진의 편지가 두 사람의 논쟁을 증명하다

이듬해인 1710년 10월, 남당 한원진이 윤혼에게 보내면서 이간에게도 보여준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제목부터

「答尹晦甫焜 兼呈李公擧」

입니다.

즉

“윤회보 윤혼에게 답하고 아울러 이공거 이간에게 보이다.”

라는 편지입니다.

한원진은 여기서 두 사람의 견해를 직접 구분합니다.

그의 기록을 요약하면,

이간은 知覺을 氣로, 四端을 理로 보았으며
윤혼은 知覺을 별도의 한 端으로 보려 했다

고 평가합니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간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제3자인 한원진이 1710년 당시 이간과 윤혼의 논쟁을 실제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대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10. 한원진은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적이었다

한원진의 입장에서는 이간과 윤혼 모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四端이 발하기 전에도 知覺은 존재하고, 四端이 발할 때에는 知覺과 四端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고 봅니다.

따라서 이미 1710년에

이간 ↔ 윤혼 ↔ 한원진

세 사람이 동일한 知覺·四端·心性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며 논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1. 1712년 ― 윤혼은 이간의 글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남당집』 권11의 **1712년 9월 「答尹晦甫別紙」**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더욱 중요한 기록입니다.

한원진은 편지 첫머리에서 윤혼에게

來諭深贊公擧之書

라고 합니다.

뜻은

“보내온 글에서 공거[이간]의 글을 깊이 칭찬하였다.”

입니다.

즉 1712년 윤혼은 한원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간의 학설 또는 편지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한원진은 이를 두고 윤혼이 좋은 것을 취하고 의리에 복종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어 이간·윤혼의 견해를 다시 반박합니다.


12. 이것은 윤혼의 학문적 입장을 다시 평가하게 합니다

앞서 윤혼을 단순히

“이간과 친한 동문·사돈”

이라고만 설명하면 부족합니다.

사료상 확인되는 흐름은 훨씬 깊습니다.

1709년
윤혼 ↔ 이간
心·性·情·知覺·四端 직접 논변

↓

1710년
한원진이 윤혼과 이간 두 사람에게 답함

↓

1712년
윤혼이 한원진에게 이간의 글을 높이 평가

라는 흐름입니다.

윤혼은 초기에는 이간에게 여러 반론을 제기했지만, 논쟁을 계속하면서 이간의 견해에 상당 부분 공감하는 방향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사료에 근거한 해석이지만, 윤혼이 모든 쟁점에서 이간과 완전히 동일해졌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13. 1719년 ― 학문 논쟁에서 인간적 우정으로

『외암유고』 권8의 세 번째 윤혼 관련 편지는 「與尹晦甫 己亥」, 즉 1719년 편지입니다.

이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윤혼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간은 매우 기뻐하며

“노형이 급제하니 참으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운다.”

는 뜻으로 축하합니다.

그러나 이간다운 축하입니다.

단순히 벼슬길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윤혼에게 관직에 나아가서도 의리를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핵심은

持循義理,無自汙辱

입니다.

즉,

“의리를 지켜 따르고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말라.”

는 당부입니다.


14. 두 사람의 관계는 약 10년에 걸쳐 확인됩니다

1709년 편지와 1719년 편지를 함께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1709년에는 서로의 철학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학문적 논쟁 상대였고,

1719년에는 서로의 출처와 삶의 자세까지 걱정하는 깊은 벗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간과 윤혼의 관계는

**사돈

  • 권상하 문하의 동문
  • 관선재 강학 동료
  • 성리학 논쟁 상대
  • 평생의 벗**

이라는 다층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5. 『외당문답서초』도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번에 다시 확인한 『외당문답서초(巍塘問答書抄)』는 특히 중요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책을 이간과 한원진의 서간 및 인물성론 관련 자료를 모아 편집한 서간집으로 설명합니다. 현재 원본 이미지가 공개되어 있는 자료도 확인됩니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한국유경편찬센터에서도 『외당문답서초』를 별도의 성리학 문헌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외암유고』만 보는 것보다 『외당문답서초』의 필사 원본까지 대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6. 현재까지 복원되는 왕복서신 구조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윤혼 → 이간
원편지 독립본은 현재 미확인
↓
그러나 『외암유고』의 來諭曰을 통해 다수 문장 복원 가능

② 이간 → 윤혼
1709 「與尹晦甫 己丑」
원문 현존

③ 윤혼 → 이간
첫 답서 이후 다시 반론
↓
두 번째 「與尹晦甫」의 來諭曰에서 내용 복원

④ 이간 → 윤혼
두 번째 「與尹晦甫」
원문 현존

⑤ 윤혼 ↔ 한원진 ↔ 이간
1710 「答尹晦甫焜兼呈李公擧」

⑥ 윤혼 → 한원진
1712, 이간의 글을 높이 평가
↓
한원진 「答尹晦甫別紙」

⑦ 이간 → 윤혼
1719 「與尹晦甫 己亥」
급제 축하와 의리의 당부.


출판 원고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결론

이 자료들을 함께 읽으면 온양의 외암정사·관선재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외암정사는 단순히 이간이 머물던 별서도, 단순한 서당도 아니었습니다.

외암 이간과 천서 윤혼이 실제로 심·성·정, 이·기, 지각·사단과 같은 조선 성리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논의했던 학술 공동체의 거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은 한원진까지 연결되어 훗날 호락논쟁으로 확대되는 사상적 흐름 안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암정사와 관선재는 이간 개인의 은거처에 머물지 않았다. 1709년 이간과 윤혼 사이에 오간 「與尹晦甫」의 왕복논변은 두 사람이 심·성·정, 허령·지각, 사성·사단과 같은 성리학의 핵심 문제를 치열하게 토론했음을 보여준다. 이 논변에는 남당 한원진까지 참여하였으며, 1712년 윤혼은 한원진에게 이간의 글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서신들은 외암정사와 관선재를 조선 후기 호서 성리학의 중요한 강학·논변 공간으로 이해하게 하는 귀중한 1차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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