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암 이간과 천서 윤혼 - 관선재에서 꽃핀 온양의 성리학




1. 윤혼(尹焜)의 기본 사항

  • 성명: 윤혼(尹焜)
  • 1676년(숙종 2) ~ 1725년(영조 1)
  • 본관: 파평 윤씨(坡平尹氏)
  • 자: 회이(晦爾)
  • 호: 천서(泉西)
  • 부친: 윤동명(尹東鳴)
  • 주요 관직: 명릉참봉·정언·지평
  • 학문적 위치: 수암 권상하의 문인, 강문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거론됨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 무렵 이미 경사(經史)를 널리 공부했다고 전합니다.

2. 윤혼의 학맥

윤혼의 학맥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핵심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율곡 이이 →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집 → 우암 송시열 → 수암 권상하 → 천서 윤혼

즉 윤혼은 율곡학파―사계학파―우암학파로 이어지는 기호 성리학의 정통 계열에 위치합니다.

특히 1707년(숙종 33)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 『대학』의 의의(疑義)를 논했는데, 권상하가 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합니다.

따라서 윤혼은 단순히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라기보다 권상하 문하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형 관료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학맥을 도식화하면

이이(李珥)
↓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권상하(權尙夏)
↓
윤혼(尹焜)

그리고 권상하 문하에서 윤혼은 이간·한원진·윤봉구·채지홍·현상벽 등과 연결됩니다. 윤혼은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즉 권상하 문하의 충청지역 주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됩니다.

3. 외암 이간과 윤혼의 특별한 관계

여기가 아산 유학사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윤혼은 외암 이간(李柬)의 사돈이자 벗이었습니다.

이간은 광덕산 강당골에 관선재(觀善齋)를 마련하고 윤혼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강론했습니다. 아산학연구소 자료에서도 두 사람을 명확하게 “사돈이자 벗”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선재는 단순히 이간 개인의 서재가 아니라,

이간 ↔ 윤혼

두 권상하 문인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 온양·아산지역 성리학의 중요한 강학 공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정리하고 있는 **『충남 유학으로 조명한 학문의 고장 온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다룰 만합니다.

4. 윤혼의 학문 활동

윤혼은 동문들과 활발하게 성리학을 토론했습니다.

특히 신경(申敬)·한원진(韓元震)·현상벽(玄尙璧)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습니다.

다른 문집 자료에서도 윤혼이 성리학의 핵심 문제인 성(性)·태극(太極) 등에 관하여 동료 학자들과 질의·토론한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것은 윤혼이 단순히 권상하에게 이름만 올린 문인이 아니라 당시 충청지역 성리학자들의 학술 토론에 실제 참여했던 학자였음을 보여줍니다.

5. 만동묘 건립 참여

1709년 윤혼은 신경·한원진·현상벽 등과 함께 스승 권상하를 따라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萬東廟) 건립에 참여했습니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를 계승하여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한 곳이므로, 이 활동은 윤혼이 송시열―권상하 계열의 학문뿐 아니라 그들의 의리론적 전통도 공유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적입니다.

6. 과거와 관직 활동

윤혼은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관료로도 활동했습니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했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1719년 명릉참봉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습니다. 이후 문한관을 거쳐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등에 올랐습니다.

『영조실록』에는 1725년 9월 8일 윤혼을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한 기록도 직접 확인됩니다.

尹焜爲持平

“윤혼을 지평으로 삼았다.”

따라서 윤혼은 성리학자 → 학행 천거 → 문과 급제 → 언관 활동으로 이어진 전형적인 학자 관료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7. 윤혼과 아산의 학문 전통

더 흥미로운 것은 윤혼과 이간의 관계가 후대에도 지역의 제향 전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아산학연구소 자료에는 강당사(관선재)의 배향 인물로

이간 · 윤혼

두 사람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도 양가 문중 후손이 제향하는 전통이 전해지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역 자료에 따르면 1816년 지역 유생들이 관선재 뒤편에 외암서사(巍巖書社)를 세워 이간과 윤혼을 함께 배향했다고 합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과정에서 훼철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윤혼은 단순한 ‘이간의 친구’가 아니라 외암 이간과 함께 아산지역에서 강학하고, 후대 지역 유림에게 함께 배향될 정도로 학문적 위상을 인정받은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온양 학맥에서의 위치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이
↓
김장생
↓
김집
↓
송시열
↓
권상하
↓
이간 ── 윤혼
↓
온양·아산지역의 강학과 성리학 전통

특히 권상하 문하에서 이간과 한원진의 인물성동이논쟁(호락논쟁)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논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윤혼 역시 이 학술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데 빼놓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윤혼을 이간 또는 한원진의 어느 한쪽 학설을 대표한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권상하 문하의 학자로서 이간 등과 긴밀히 강학·교유한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천서 윤혼은 권상하의 문인으로 기호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하고, 외암 이간과 사돈이자 학문적 동지로서 광덕산 관선재에서 함께 강학함으로써 조선 후기 온양·아산 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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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李柬)의 문집 『외암유고(巍巖遺稿)』 권15에 실린 

「외암정사개기제토지문(巍巖精舍開基祭土地文)」을 기준으로 원문을 대조해 보았습니다. 

이 글은 정해년(丁亥), 즉 1707년 외암정사를 세우면서 토지신에게 고한 제문입니다. 

원문 제목 자체가 「巍巖精舍開基祭土地文」이므로, 당시 명칭이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는 점도 확실하게 확인됩니다. 


『외암유고』 권15

巍巖精舍開基祭土地文 丁亥

외암정사를 처음 터 잡으며 토지신에게 올린 제문 — 1707년

아래에서는 원문의 흐름에 따라 나누어 번역하겠습니다.

1. 산천의 기운과 학문할 장소

茫茫堪輿。風氣日散。至勇絶智。孰得以挽積聚之所。猶尙磅礴。高山邃壑。淑氣蓊欝。神移境換。養力易到。

번역

아득하고 넓은 천지에 풍기(風氣)는 날로 흩어져 간다.
아무리 지극히 용감하고 뛰어난 지혜를 지녔다 한들 누가 그것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운이 모이고 쌓인 곳에는 아직도 웅대한 기운이 서려 있으니,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에는 맑고 아름다운 기운이 무성하다.

그러한 곳에서는 정신이 달라지고 경계가 바뀌어, 자신의 힘을 기르는 공부도 쉽게 이루어진다.

해설

여기서 이간은 단순히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산천의 환경이 사람의 정신 수양과 학문에 영향을 준다는 성리학적 공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 옛 성현들의 강학처를 본받다

肆古先覺。於焉負抱。廬阜百原。或晩或早。九曲南澗。飫嬉到老。陶山石潭。曁華之陽。東夏絶境。卷懷行藏。

번역

그러므로 옛 선각자들도 이러한 곳을 찾아 뜻을 품고 머물렀다.

여산과 백원에서 혹은 늦게, 혹은 일찍이 학문하였고, 구곡과 남간에서는 늙도록 학문을 즐겼다.

도산과 석담, 그리고 화양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 동방과 중국의 빼어난 경승지로서, 선비들이 자신의 뜻을 간직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결정하던 곳이었다.

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지명들은 단순한 명승지가 아닙니다.

廬阜·百原 → 九曲·南澗 → 陶山·石潭 → 華陽

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적 강학 공간을 상징합니다.

특히

  • 陶山(도산) → 퇴계 이황
  • 石潭(석담) → 율곡 이이
  • 華陽(화양) → 우암 송시열

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간은 자신이 세우려는 외암정사를 성현과 선유들이 산수 속에서 학문하고 수양했던 전통의 연장선에 놓고 있습니다.


3.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

이 글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부분입니다.

眇余末學。二三志同。欲謀羣居。於何揭宮。

번역

보잘것없는 말학(末學)인 내가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과 함께 모여 살고자 하니,
어디에 집을 세울 것인가.

여기서 핵심 표현은

二三志同 欲謀羣居

입니다.

직역하면,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과 함께 모여 사는 것을 도모하고자 한다.”

입니다.

이것은 외암정사가 이간 개인의 은거처만을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장입니다.

즉 처음부터 동지들과 함께 거처하면서 공부하고 강론하기 위한 공동 강학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문장의 ‘二三志同’이 윤혼을 직접 지칭한다고 원문에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후대 자료에서 외암정사가 이간이 벗 천서 윤혼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윤혼이 그 학문 공동체의 핵심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개기제토지문」 자체만으로 ‘二三志同 = 윤혼’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4. 이간이 직접 묘사한 광덕산과 용추

睠玆華岳。湖海之紀。大勢北開。䧺邃可喜。第一洞天。粵有龍湫。蒼巖壁立。玉虹飮流。

번역

이 화악(華岳)을 돌아보니 호서 지방의 큰 산줄기가 되고, 큰 산세가 북쪽으로 열려 있어 웅장하고 깊숙함이 참으로 기쁘다.

이곳은 제일가는 별천지이다.

그곳에 용추(龍湫)가 있는데, 푸른 바위가 벽처럼 우뚝 서 있고 옥빛 무지개가 물을 마시는 듯하다.

여기서 龍湫(용추)가 직접 등장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현재 강당골 일대에 전하는 용추와 연결되는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외암정사의 위치를 단순히 후대 전승으로만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간 자신의 글에서 주변 지형을 직접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외암정사의 실제 터를 묘사하다

泝源而上。未數十步石門中斷。雲根布濩。紀夷而堂。若排案俎。形開勢合。瀟灑淸適。

번역

물을 거슬러 올라가 수십 보도 채 가지 않은 곳에 석문(石門)이 중간에서 갈라져 있고,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평탄한 곳을 골라 집을 지을 만한데, 마치 책상과 제기상을 가지런히 펼쳐놓은 듯하다.

지형은 탁 트이면서도 산세가 서로 모여들어, 맑고 깨끗하며 매우 쾌적하다.

이 부분은 외암정사 터의 지형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현장 기록입니다.

앞의 龍湫와 함께 보면,

용추 → 물길을 거슬러 올라감 → 수십 보 이내 → 석문 → 평탄한 터 → 외암정사

라는 공간적 단서가 나타납니다.

현재 강당사·관선재 주변의 옛 지형과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가 가능합니다.


6.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가

可詠可歗。可振可濯。相羊娛樂。捨此何之。

번역

여기에서는 시를 읊을 수도 있고 휘파람을 불 수도 있으며, 옷깃을 떨치고 몸을 씻을 수도 있다.

한가롭게 거닐며 즐길 수 있으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여기서 외암정사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단순한 서재가 아니라,

독서 + 강학 + 심신수양 + 자연 속 생활

을 함께 실천하는 공간입니다.


7. “나는 이곳에서 늙으리라”

그리고 글의 절정에 해당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於以經營。將老於斯。

번역

이에 이곳을 경영하여
장차 이곳에서 늙으리라.

짧은 문장이지만 외암정사에 대한 이간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외암정사는 임시 강학소가 아니라 평생 학문하고 수양하며 살아갈 공간으로 계획된 것입니다.


8. 외암정사의 터를 열며 토지신에게 고하다

玆涓穀朝。迺拓厥基。載蠲泂酌。用告於神。神之佑之。永世不𠍴。

번역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비로소 그 터를 닦아 열고,

깨끗한 술을 마련하여
토지의 신에게 고하나이다.

신께서 이를 도우시어
영원토록 허물어지지 않게 하소서.


전체 원문의 의미

이 글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외암정사의 건립 목적이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이간은 단순히 경치 좋은 광덕산에 별장이나 개인 서재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꿈꾼 것은

① 좋은 산천에서 심신을 수양하고
②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함께 거처하며
③ 학문을 강론하고
④ 선현들의 강학 전통을 계승하여
⑤ 평생 이곳에서 학문하며 살아가는 것

이었습니다.

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원문이 바로

二三志同 欲謀羣居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과 함께 모여 살고자 한다.

그리고

將老於斯
장차 이곳에서 늙으리라.

입니다.

외암정사와 윤혼의 관계를 다시 보면

이 기록과 윤혼에 관한 자료를 함께 놓고 보면 의미가 더 커집니다.

충청남도 자료는 현재 강당사가 본래 이간이 세우고 벗 천서 윤혼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던 외암정사였으며, 권상하에게서 ‘관선재(觀善齋)’라는 당호를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이간 사후 영당을 거쳐 1816년경 외암서사의 성격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합니다.

“1707년 이간은 광덕산에 외암정사(巍巖精舍)를 세우면서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二三志同]과 함께 모여 살며[欲謀羣居]’ 학문하고, ‘장차 이곳에서 늙겠다[將老於斯]’는 뜻을 밝혔다. 후대 자료에서 외암정사는 천서 윤혼과 함께 강론하던 곳으로 전하므로, 외암정사는 이간 개인의 은거처를 넘어 온양 지역 성리학자들의 강학·교유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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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암 이간의 기본 사항

이간(李柬, 1677~1727)

  • 본관: 예안(禮安)
  • 자: 공거(公擧)
  • 호: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
  • 스승: 수암 권상하(權尙夏)
  • 학문적 위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 대표 학설: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 호락논쟁에서 낙론(洛論)의 대표 학자
  • 저서: 『외암유고(巍巖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이간을 명확히 “권상하의 문인으로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외암 이간의 학맥

큰 줄기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곡 이이(李珥)
↓
사계 김장생(金長生)
↓
신독재 김집(金集)
↓
우암 송시열(宋時烈)
↓
수암 권상하(權尙夏)
↓

외암 이간(李柬)

다만 자료에 따라 중간 계보를 압축하여

이이 → 김장생 → 송시열 → 권상하 → 이간

으로 표시하기도 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강문팔학사 항목도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진 정통 기호학파”라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출판 원고에서는 계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기보다는 김집까지 포함하여 설명하되, ‘학설의 직접적인 전승관계와 학문적 계보를 개괄한 것’이라고 밝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3. 직접적인 스승은 수암 권상하

이간의 학문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권상하(權尙夏, 1641~1721)입니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송시열 사후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했습니다. 청풍 황강의 한수재(寒水齋)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을 강문(江門)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중 뛰어난 학자들을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또는
호중팔학사(湖中八學士)

라고 불렀습니다.

대표적으로

한원진 · 이간 · 윤봉구 · 채지홍 · 현상벽 · 윤혼 등이 포함되는데, 문헌에 따라 여덟 명의 명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8인을 절대적인 고정 명단처럼 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4. 중요한 점 — 이간은 스승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지만은 않았다

이 부분이 외암 이간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맥은 분명히

이이 → 김장생 → 송시열 → 권상하 → 이간

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학맥을 계승한다는 것과 스승의 모든 철학적 견해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다릅니다.

이간은 사람과 사물의 본성 문제에서 동문인 남당 한원진(韓元震)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간

人物性同論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근원적으로 같다.

한원진

人物性異論
사람과 사물의 본성에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스승 권상하는 한원진의 인물성이론 쪽을 지지했습니다.

즉,

권상하
↙       ↘
이간     한원진
人物性同     人物性異
↓        ↓
낙론(洛論)  호론(湖論)

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5. 호락논쟁의 중심에 선 외암 이간

처음에는 권상하 문하 내부의 학술 논쟁이었지만 이후 서울·경기와 충청지역 학자들이 참여하면서 호락논쟁(湖洛論爭)으로 확대됩니다.

이간의 견해에는 서울의 김창흡(金昌翕)·박필주(朴弼周) 등의 학자들이 호응했습니다. 반면 권상하 문하의 상당수 학자들은 한원진의 견해에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이간은 단순한 ‘권상하의 제자’가 아닙니다.

기호학파 내부에서 새로운 철학적 논의를 발전시켜 낙론이라는 중요한 학문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자입니다.


6. 외암 이간과 윤혼

앞에서 조사한 천서 윤혼(泉西 尹焜)도 바로 이 지점에서 연결됩니다.

두 사람 모두

송시열 → 권상하

로 이어지는 학문적 기반을 공유한 권상하 문하의 동문입니다. 윤혼 역시 강문팔학사에 포함시키는 문헌이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단순한 동문 관계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암정사의 관선재(觀善齋)에서 이간은 윤혼과 도학을 강론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선재’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스승 권상하였습니다.

따라서,

권상하 → 이간·윤혼 → 관선재 강학

이라는 연결고리가 사료상 상당히 중요합니다.


7. 외암정사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앞에서 살펴본 『외암유고』의

「巍巖精舍開基祭土地文」

과 이 학맥을 함께 놓고 보면 외암정사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간은 외암정사를 세우면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공동으로 거처하며 학문할 공간을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관선재에서는 동문 윤혼과 도학을 강론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외암정사는 단순한 이간의 개인 별서나 은거지가 아니라,

권상하 문하의 기호 성리학이 온양·아산 지역에서 강학되고 전승된 학문 공간

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8. 온양 유학사에서 이간의 위치

제가 보기에 지금 준비하고 계신 온양 유학사에서는 이간을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호 성리학의 온양 정착과 외암 이간」

율곡 이이
↓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집
↓
우암 송시열
↓
수암 권상하
↓
외암 이간 ─ 천서 윤혼
↓
외암정사·관선재
↓
온양에서 이루어진 강학과 성리학 연구

그리고 이간에게서 다시

인물성동론 → 낙론 → 호락논쟁

이라는 조선 후기 성리학사의 큰 흐름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온양은 단순히 유명한 유학자가 살았던 지역이 아니라, 18세기 조선 성리학의 핵심 철학 논쟁이 형성되고 강론된 중요한 학문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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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의 학맥과 온양 유학의 형성

1. 학맥의 큰 줄기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의 학문은 조선 후기 율곡학파·기호학파의 정통적인 계보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율곡 이이(李珥)
↓
사계 김장생(金長生)
↓
신독재 김집(金集)
↓
우암 송시열(宋時烈)
↓
수암 권상하(權尙夏)
↓

외암 이간(李柬)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강문학파의 계보를 개괄하면서 이이 → 김장생 → 송시열 → 권상하로 압축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책에서는 김집을 포함한 상세 계보와 압축 계보를 구분해서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이간의 철학적 출발점 역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있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개한 이간의 글을 보면 그는 직접 율곡의 ‘理通氣局’ 네 글자를 이기론의 핵심적 지침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 1707년 ― 윤혼과 함께 권상하 문하에 들어가다

이간의 학문적 생애에서 1707년(숙종 33)은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아산 외암마을 자료에는 이간과 천서 윤혼이 1707년 함께 청풍 황강으로 가서 권상하의 문하에서 『대학』의 의리를 논하였다고 전합니다. 권상하는 두 사람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간과 윤혼은 단순히 훗날 만난 지역 학자가 아니라,

같은 시기에 권상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

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학문 관계를 구조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시열
↓
권상하
↓
이간 ── 윤혼

이 관계가 이후 아산의 외암정사·관선재로 연결됩니다.


3. 1707년 ― 외암정사 건립과 강학 공동체의 시작

같은 1707년 이간은 광덕산 강당골에 외암정사(巍巖精舍)를 마련합니다.

앞서 살펴본 『외암유고』 「외암정사개기제토지문」에서 이간은 정사를 세우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二三志同 欲謀羣居

즉,

“뜻을 같이하는 두세 사람과 함께 모여 살고자 한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외암정사는 이간 개인의 은거처라기보다 처음부터 뜻을 함께하는 학자들과 거처하면서 학문을 토론하려는 강학 공간으로 구상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후대 자료에서는 이곳에서 실제로 이간이 윤혼과 도학을 강론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기록합니다. 현재의 관선재가 바로 그 전통을 계승한 공간입니다.


4. 『외암유고』에서 확인되는 권상하와의 학문적 관계

이간이 스승 권상하와 얼마나 긴밀하게 학문을 논했는지는 『외암유고』 자체가 잘 보여줍니다.

디지털장서각의 『외암유고』 해제에 따르면 권4~11에 서간 150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스승 권상하에게 올린

「上遂菴先生」

상수암선생

이라는 편지가 무려 33편에 달합니다.

여기서 다룬 주제도 단순한 안부가 아닙니다.

『중용』 의문, 『심경』 의문, 『가례』, 이기론, 미발·이발, 성리학의 심성 문제 등을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했습니다.

따라서 이간과 권상하의 관계는

스승 → 제자에게 학설을 일방적으로 전달

하는 관계라기보다,

질문 → 답변 → 재질문 → 논변

으로 이어지는 고도의 학술적 사제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5. 이간은 스승의 학설까지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간의 학문적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권상하를 깊이 존경했지만 스승의 견해를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개한 이간의 「이통기국변」 계열 논의를 보면, 이간은 권상하의 「천명도(天命圖)」가 율곡의 이통기국의 본뜻을 지나치게 분리하여 설명했다고 비판합니다.

즉 이간에게 학통 계승이란

스승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율곡·주자의 본뜻까지 되돌아가 다시 검증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후 권상하와도 철학적 견해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6. 1709년 무렵 ― 한원진의 학설과 처음 본격적으로 마주하다

『외암유고』 권7에는 기축년(己丑), 즉 1709년으로 표시된 「여최성중(與崔成仲)」이 실려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이간은 한원진을 그의 자인

韓德昭, 한덕소

라고 부르면서 그의 학설을 상당히 자세히 검토합니다.

특히 여기에서 이미

  • 본연지성(本然之性)
  • 기질지성(氣質之性)
  • 미발(未發)
  • 오상(五常)
  • 사람과 금수의 본성
  • 심과 기질

등 훗날 호락논쟁의 중심 주제가 되는 문제들이 거의 모두 등장합니다.

따라서 호락논쟁을 단순히 어느 한 해 갑자기 시작된 논쟁이라고 보기보다는, 1709년 전후부터 권상하 문하 내부에서 문제의식이 축적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7. 이간과 한원진 ― 동문에서 논쟁의 두 주역으로

이간과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은 모두 권상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입장이 갈라졌습니다.

이간

人物性同論

본연의 성이라는 근원에서 보면 사람과 사물의 성은 동일하다는 입장입니다.

한원진

人物性異論

사람과 사물의 성은 기질과 결부된 현실적 존재에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논쟁이 권상하 문하에서 발생했으며, 권상하는 한원진의 견해를 지지했고 이간은 권상하와 한원진을 상대로 자신의 견해를 논변했다고 설명합니다.


8. 『외암유고』에 남은 한원진과의 직접 논변

이 관계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1차 사료가 『외암유고』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편지가

「答韓德昭別紙」

답한덕소별지

「與韓德昭」

여한덕소

입니다.

‘덕소(德昭)’는 한원진의 자입니다.

디지털장서각 해제는 이 편지들이 한원진의 견해를 직접 논박하면서 다음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했다고 설명합니다.

미발의 선악
천명과 오상
기질과 본연
인물성의 동이

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들은 호락논쟁을 연구할 때 매우 중요한 당사자 간 직접 자료입니다.


9. 이간이 한원진을 비판한 핵심

이간의 핵심 논리는 상당히 일관됩니다.

그는 이(理)와 기(氣)가 실제 세계에서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자체의 보편성은 기질의 차이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一原異體

일원이체

입니다.

근원은 하나이나 개별 존재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과 동물은 현실적 기질과 능력에서는 분명히 다르지만, 본연의 이라는 근원에서 보면 동일한 보편적 원리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간의 기본 입장입니다. 디지털장서각 해제 역시 이간이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원진의 견해를 비판했다고 설명합니다.


10. 현상벽 ― 이간의 중요한 학문적 동조자

관봉 현상벽(冠峯 玄尙璧, 1673~1731) 역시 권상하 문하의 학자였습니다.

강문팔학사를 설명하는 자료에서는 특히 권상하의 주요 문인 중 현상벽이 이간의 인물성동론에 동조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권상하 문하의 많은 학자들이 결국 한원진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도를 단순화하면

권상하 문하

→ 한원진 계열 : 인물성이론
→ 이간·현상벽 계열 : 인물성동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 1713~1714년 ― 현상벽과의 실제 서신

『외암유고』에는 현상벽에게 보낸 편지가 실제로 남아 있습니다.

현상벽의 자가 언명(彦明)이므로 편지 제목이

「答玄彦明」

「與玄彦明」

으로 되어 있습니다.

권7에는 계사년(癸巳, 1713)의 「답현언명」 계열 서신과, 이어 갑오년(甲午, 1714) 「여현언명」이 확인됩니다.

1714년 편지에서도 이간은

본연(本然)·당연(當然)·기질지성(氣質之性)·인물지성(人物之性)·미발(未發)

등을 현상벽과 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벽과 이간은 단순히 같은 학파로 후대에 분류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심성론을 토론한 학문적 동료였습니다.


12. 윤혼과의 관계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한원진과 현상벽과의 관계가 주로 성리학 논변에서 두드러진다면, 윤혼과의 관계는 조금 다릅니다.

윤혼과 이간은

동문 + 친구 + 사돈 + 지역 강학의 동반자

라는 복합적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가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된 장소가 외암정사·관선재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관선재를 이간이 윤혼과 도학을 강론하고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윤혼은 이간의 철학을 단순히 지지하거나 반대한 학자가 아니라 온양에서 실제로 함께 강학 공동체를 운영했던 동료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13. 네 사람의 관계를 한눈에 보면

이제 관계가 상당히 명확해집니다.

수암 권상하
↓
┌────────┬────────┬────────┐
이간  윤혼  한원진  현상벽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다시 갈립니다.

이간 ─ 현상벽
→ 인물성동론 쪽

한원진
→ 인물성이론

권상하
→ 논쟁 과정에서 한원진의 견해에 가까움

윤혼
→ 이간과 외암정사에서 함께 강학했으나, 현재 확인한 자료만으로 그를 이간의 인물성동론 계열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구분은 출판물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14. 외암 이간의 학문 형성 연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기주요 내용의미
1677이간 출생온양·아산 지역 학자
1707윤혼과 함께 권상하 문하에서 수학기호학파 학통 본격 계승
1707외암정사 건립공동 강학 공간 조성
1709 전후한원진 학설에 대한 검토·논변 확인호락논쟁의 문제의식 형성
1710년대권상하·한원진과 미발·인물성 문제 논변독자적 성리설 확립
1713~1714현상벽과 서신 교류인물성동론을 둘러싼 학술 교류
이후한원진과 직접 논쟁호락논쟁으로 확대
1727이간 사망낙론의 선구자로 평가

『외암유고』 자체에는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가 33편이나 있으며, 한원진과의 왕복서신과 현상벽에게 보낸 편지가 다수 남아 있어 이러한 학문적 관계를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 출판 원고에서 특히 강조할 부분

이간의 학문을 단순히 “권상하의 제자이며 낙론의 대표 학자”라고만 설명하면 중요한 부분이 빠집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외암 이간은 율곡 이이에서 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진 기호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했으나, 스승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중용』·『심경』·율곡의 이통기국설 등을 스스로 재검토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탐구는 한원진과의 인물성 논쟁으로 발전했고, 현상벽 등의 동조를 얻어 후일 낙론 형성의 중요한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고향 온양에서는 동문 윤혼과 외암정사·관선재를 중심으로 강학하며 이러한 학문을 지역사회에 뿌리내렸다.


온양 유학사에서의 의미

외암 이간의 활동을 보면 온양은 단순히 유명한 성리학자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권상하 문하의 학문 → 외암정사·관선재 → 이간·윤혼의 강학 → 한원진·현상벽 등과의 전국적 학술 논변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확인된다.

그러므로 외암정사와 관선재는 18세기 조선 성리학의 핵심 논쟁과 연결된 온양의 실제 강학 공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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